[21년]워싱턴 군축조약과 영국의 쇠락... Le mo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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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Washington Naval Treaty)은 1921년 11월 11일에서 1922년 2월 6일 까지 미국의 워싱턴 DC에서 개최된 워싱턴 회의 중 해군의 군축 문제에 대한 토의에서 채택된 조약이다.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의 전함, 항공모함 등의 보유 제한에 합의하는 내용이었다. - 각국의 해군력의 비율을 10 미국 : 10 영국 : 6 일본 : 3.5 프랑스 : 3.5 이탈리아로 정했다. 

[Margaret Lamb and Nicholas Tarling, From Versailles to Pearl Harbor: The Origins of the Second World War in Europe and Asia, Palgrave; 2001, 37.]

워싱턴 군축조약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시작된 동아시아에서의 영국의 쇠락을 부채질했다. 이제 영국의 관심사가 변했다. 아시아에서의 영국의 관심은 석유의 원천인 중동과 인도와 고무의 주산지 말라야 Malaya 가 되었다. 

홍콩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싱가포르 Singapore 가 이제 최고의 전진 기지가 되었다. 극동에서 싱가포르가 영국에게 중요 거점으로 부상한 것은 영국의 힘 보다는 상대적 쇠락을 반영했다. 전후에 영국이 해군력으로 유럽에서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유럽 밖에서 해군 기지를 가져야만 하는 상황에 봉착했고, 탐색과정에서 찾은 곳이 바로 싱가포르였다. 

그럼에도, 싱가포르에서 영국은 다만 제한적인 해군력 만을 보유했다. 주요 역할은 영국이 위기 상황에서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주력 함대를 이동하는데 필요한 기지가 되는 것이었다. 

하나의 대양 함대를 가진 영국 해군이 두 개의 대양인 대서양과 태평양을 방어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싱가포르의 역할은 한계가 있었다. 영국의 싱가포르 개발은 지지부진했다. 

싱가포르의 드라이 독이 완성된 것은 1938년 2월이었다. 


참고- 

Margaret Lamb and Nicholas Tarling, From Versailles to Pearl Harbor: The Origins of the Second World War in Europe and Asia, Palgrave; 2001,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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