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몰로토프,일본 전쟁에 대비해야 하는 이유? Le monde

[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


1933년 5월의 탕구협정 이후 ,만주사변이 공식 종료되면서, 중국에서 왕징웨이의 주도하의 남경 정부는 일본에 대한 우호정책을 실시했다. 중국의 친일정책의 결과, 1935년 초가 되면, 중일 화해를 넘어선, 중일동맹의 가능성까지 제기되자, 소련은 긴장하게 되었다. 극동에서의 중일동맹의 결성은, 일본의 소련 침략 위험을 높이면서, 극동에서의 소련의 안보를 위협할 것이 분명했다.

1935년 1월 28일, 인민위원평의회 주석 몰로토프가  소비에트 연방 소비에트 대회 (소련 의회)에서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바로 이 같은 상황에서 였다. 

몰로트프에 따르면, 소련은 이미 1931년 12월에 일소 불가침조약 a non-aggression pact with Japan 을 제안했지만, 이를 거절한 것은 바로 일본이었다. 만주사변 이후 지난 4년 동안, 일본에 대해서 소련은 모든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을 주장했고, 전략적 인내 정책을 실천했다. 이는 사실상 일본에 대한 소련의 유화정책이었다.  "우리는 일소 관계의 개선을 위해 노력했고, 이를 희망했으며, 극동에서의 평화 유지가 긍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몰로토프에 따르면, " 우리는 현상태에 안주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일본의 침략,군국주의 세력이 무기를 내려놓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최근에 소련에 대한 전쟁을 공개적으로 주장한다... 우리는 이 사실을 묵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난 소련 개입 전쟁에서 이 땅을 가장 마지막으로 떠난 것이 바로 일본인들이었기 때문이다. 1922년 10월 말이 되서야, 비로서 일본이 블라디보스톡에서 철수했고, 이는 소련으로부터 가장 마지막으로 퇴거한 침략국 군대였다." 

실제로, 일본 육군 참모본부 러시아과 제2국에서 가사하라 Kasahara 중령의 책임하에 작전명 OTSU 라는 이름의 소련 전쟁 계획이 작성 중이었다. OTSU 를 마무리한 것은 제1국의 이마이 중령이었다. 1935년 3월에 이 작전은 천황에게 제출되었고, 승인을 받았다. 계획은 극동에서의 일본 전력이 소련 군에 대해서 2:1의 우위를 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확히 이런 연유로, 극동에서의 소련군 증강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야 했다. 

Haslam, J. (1992). The Soviet Union and the Threat from the East, 1933-41 -Moscow, Tokyo, and the Prelude to the Pacific War. New York City, New York, United States of America: Palgrave MacMillan, 45-46.

- 소련은 만주사변 이후 일본에 대해서 유화정책을 원칙으로 협상하려 했지만, 무위에 그쳤다.
그 대안으로 추진한 것이 바로 중국의 장개석과 손을 잡는 것이었다. 
중국과 손을 잡으면서, 소련은 중일동맹 가능성을 차단하고, 중국과 일본을 싸우게 만들어서,
일본이 소련을 공격할 가능성을 제거하려 했다. 
이것이 바로 39년 독소불가침 조약 이전까지의 소련의 극동전략의 윈칙이었다고 볼 수 있다. 

장개석의 입장에서 보면, 소련이 손을 내민 것은
국내에서 보면, 친일파 왕징웨이를 제거할 기회가 되었다. 
이렇게, 소련과 손을 잡으면서, 장개석은 항일전쟁을 위한 외세의 지원을 얻고,
국내정치에서 왕징웨이 세력을 제거할 기회를 잡게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1936년 12월의 시안 사변은 국제정치와 중국 국내정치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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