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


1930년대 내내 소련과 일본은 극동에서 간헐적으로 충돌했다.
이 충돌 중에서 소련에게 가장 위험했던 것은 32년 8월의 위기 상황이었던 것 같다.
중일전쟁 발발과 더불어, 이누카이 쓰요시 내각에서 소련과의 전쟁을 주장하는 일본 육군 황도파의 대부, 아라키 사다오가 육군대신을 역임할 동안(1931-1934), 황도파가 주도하는 일본은 소련과의 전쟁을 선동했다.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경고하는 전문이 각각 도쿄와 런던으로부터 도래한 것은 바로 이 같은 상황에서 였다.
1932년 8월 19일
도쿄의 소련 대표부의 알렉산드르 트로야노프스키 Aleksandr Troyanovsky, 본국 보고서
육군대신 아라키 사다오와 그의 추종세력(황도파)가 최근에 소련과의 전쟁을 위한 선동을 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다수파는 아라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트로야노프스키에 따르면, 아라키의 주장에 대한 반대의견이 존재하고 특히 코이소 장군이 반대한다고 보고했다. 고이소는 이임을 위한 고별 만남에서 본인에게, 일본과 일본군은 소련에 대해서 평화를 사랑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평화정책을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하며,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기습에서 의해 놀라게 돼서는 안 된다고 그가 강조했다.
Troyanovsky (Tokyo) to Karakhan (Moscow), 19 August 1932: Haslam, J. (1992). The Soviet Union and the Threat from the East, 1933-41 -Moscow, Tokyo, and the Prelude to the Pacific War. New York City, New York, United States of America: Palgrave MacMillan, 7.
- 8월 19일, 런던의 소련 대리대사 보고몰로프가 본국에 보고,
첩보에 따르면, 영국 외무차관 앤서니 이든이 몇 달 전에, 일본 정부가 영국과 프랑스에게 자국이 소련과 전쟁이 발발할 경우에 직접 지원을 기대할 수 있는지에 대해 문의했다고 공개했다. 이든에 따르면, 영국 정부는 현 상황에서 영국 정부의 대답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Bogomolov (London) to Litvinov (Moscow), 19 August 1932: Haslam, J. (1992). The Soviet Union and the Threat from the East, 1933-41 -Moscow, Tokyo, and the Prelude to the Pacific War. New York City, New York, United States of America: Palgrave MacMillan, 7.
1932년 일본에 의한 극동의 위기가 소련의 유럽정책에 준 영향은 무엇일까?
당시 유럽에서 소련-프랑스 관계가 악화된 상황에서, 소련은 유럽에서 프랑스가 주도하는 서양 세력과 극동에서 일본 제국과의 동시다발 양면전쟁의 위협에 노출되었다. 특히 스탈린은 폴란드와 일본의 양면 공격을 두려워했다.
따라서 만주사변 이후 소련이 프랑스와의 화해정책에 적극 나섰다면, 그 동기는 극동에서의 일본의 도발이었다고 볼 수 있다.
30년대 중반의 소련의 유럽정책에 대한 전통적 해석은 소련의 서양과 국제연맹에 대한 의존, 즉 집단안보 외교의 기원을 1933년 히틀러의 집권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히틀러 집권 이전인 1932년, 이미 소련은 일본의 전쟁 위협에 대한 대응으로 프랑스와의 화해를 추진했다고 한다면, 소련 집단안보 외교정책의 기원은 히틀러가 아니라, 만주사변 이후의 일본의 도발에서 찾아야 한다고 볼 수 있다.
32년 이후 소련은 우선적으로 일본의 도발에 맞서기 위해서, 그리고 유럽과 극동에서의 양면 전쟁의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서, 서유럽 국가와의 화해가 필요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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