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년]미일 협상에 대한 장개석과 처칠의 초조함? Le monde

[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




1941년 미국과 일본의 협상에 대한 장개석과 처칠의 인식은 무엇이었나?

1941년 2월에 시작된, 미국 국무장관 헐과 주미 일본대사 노무라 기치사부로의 미일 협상에 대해서, 중국의 장개석과 영국의 처칠은 긴장 속에 이를 주시했다. 히틀러의 독일도 마찬가지였다. 양 진영은 모두 , 미국과 일본이 자신에게 불리한 합의에 도달하여, 동맹관계가 이완되는 사태를 우려했다.

아키라 이리에에 따르면, 특히 같은 해, 9월-12월 동안, 중국과 영국 관리들은 서로 긴밀하게 접촉했고, 회담의 결과에 촉각을 곤두 세웠다. 중경의 영국 대사에 따르면, 미국 정부가 중국을 팔아넘기면서, 영국도 그렇게 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불안이 고조되었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중국 측에, 미국이 중국을 일본에게 팔아넘기는 일은 없을 것이라 달래야만 했다. 왜냐하면, 미국,영국,중국은 모두 유럽 혹은 태평양에서 같은 전쟁에서 싸우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세계적인 민주주의 동맹이 결성되었고, 중국은 침략세력 일본과의 평화라는 단기적인 이익을 위해서 희생당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 장개석과 처칠이 그해 11월 말에 루스벨트에게 강조한 사안이었다. 당시 두 사람은 워싱턴에서 미일간의 양해 각서가 교환될 지도 모른다는 첩보를 입수했고, 이에 대한 반대를 제기했다. 결국 루스벨트는 영중의 주장에 동의, 양해각서의 교환에 대해 반대했다.

중경과 런던이 모두 수용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11월 26일의 이른바 헐 노트의 요구사항이었다. 헐 노트는 일본군이 인도차이나에서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철군해야 하며, 일본이 1920년대의 국제주의 정신으로 회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시말해, 일본이 민주진영에 가담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계속 국제적 왕따 상태로 남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참고-

Iriye, A. (1986). Japanese aggression and China's international position 1931–1949. In J. Fairbank & A. Feuerwerker (Eds.),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pp. 492-546).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529-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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