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


오늘날 유튜브에서는 이런 유의 선동가들이 넘쳐나지만,
동경대 출신에 베이징 유학파 출신의 지식인 다케우치 요시미는
일본이 전세계에 대해 벌인 전쟁에 대한 감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 다케우치 요시미, (동경대 중문학 전공, 베이징 유학파 출신)
그는 자신이 주재하는 잡지에 〈대동아전쟁과 우리의 결의>를 기고했다. “역사는 만들어졌다. 세계는 하룻밤 사이에 변모했다. 우리는 눈앞에서 그것을 보았다. 감동에 몸을 떨면서 무지개처럼 흐르는 한줄기 빛의 행방을 지켜보았다. 12월 8일 선전 조서가 내려진 날,일본 국민의 결의는 하나로 불타올랐다. 상쾌한 기분이었다. ...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는 지나 사변(중일전쟁) 앞에서 하나가 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의혹이 우리를 괴롭혔다. (…) 우리 일본이 동아 건설의 미명에 숨어서 약자를 괴롭히는 것은 아난가하고 지금껏 의심해왔다. (…) 이 장엄한 세계사의 변혁 앞에서 생각해보면 지나사변은 하나의 회생으로서 견딜 수 있는 일이었다.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은 훌륭하게 지나사변을 완수했고,그 의의를 세계에 부활시켰다.지금 대동아전쟁을 완수하는 것은 우리다.” <<중국문학>> 80호, 1942년 1월 1일.
가토 요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 청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까지, 서해문집,2018. 363.
- 다케우치 요시미는 패전 이후 좌파로 전향했고,
도쿄 도립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전후 일본에서 그는 중국문학, 특히 루쉰 문학 전문가로 변신하는데 성공했다.
1963년에 그는 친중파가 되어, 모택동과 문화대혁명을 지지했다.
덧글
그 '의심'을 거두지 말고 확신했어야지 이 돌대가리야. 니가 생각해왔던 게 정확했단 말이다. -라고 해봐야 이젠 의미가 없군요. 젠장.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개인의 한 발언으로 인물의 일면을 부조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에는 문제가 많다는 점이었습니다. 다케우치의 사상은 그 시대에 그가 속해있던 지적인 사상계와 그가 대항하고자 했던 문제의식들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오해의 여지가 크다고 쓴것입니다.
일본식 탈근대를 위한 역사의 필연,혹은 신성한 폭력이었다고 볼 수 있을까요?
1894년 이후의 일본의 대륙침략은 유럽식 근대에 맞서,
5족이 협화되는 아시아식 대안적 근대로, 포스트모던식 대안적 근대를 위한 몸부림이었습니까?
그리고 일제에 대한 저항,항거는 탈근대적 성격을 이해하지 못한 , 시대착오적 저항이었습니까?
이른바 근대의 초극 사상은 일본 관동군, 통제파 혹은 황도파, 이시하라 간지, 고노에 후미마로 사상에 어떤 영향을 주었습니까?
그리고 님은 근대의 초극이란 기획을 긍정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고 봅니까?
말씀하신 것처럼 일본제국이 근대의 초극을 대동아전쟁의 사상적 기초로 삼으려했으며, 합리화 기제로 이용되었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오족협화라는 정책이 그걸 진심으로 믿고 실현하려 했던 일부의 몽상가(이시하라를 대표적인 사례라고 생각합니다.)들도 있지만, 실제 정책적인 형태에서는 불가능 했으며, 식민지 상태를 가리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소위 "식민지 근대가 진정으로 가능했다거나, 내지인과 외지인이 동등한 '시민'으로 대우받을 수도 있었다"라는 주장에 비판적입니다.
다만 제가 관심있는 것은 근대의 초극이 어떤 지적인 맥락에서 나왔으며, 각 개인들은 그 담론을 어떻게 수용했냐는 겁니다. 저는 이 질문에 답하는게 현재 일본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시한다고 봅니다. 가령 마루야마 마사오가 말하는 일본의 자연주의나 다이쇼 문화주의에 대한 비판이 대표적이겠죠. 사실 한국에서 흔히들 하는 정치인의 계보를 기반으로 일본 정치권을 분석하는 것보다는 이런 계보학적인 맥락에서 일본 정치를 이해하는게 더 옳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선전의 수단이던 근대의 초극이나 대동아주의를 지식인들이 아닌 식민지 대중은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도 관심사죠.
하지만 한국에서 통하는 일본제국주의-반식민주의라는 단순한 도식상에서 이해하면, 모순되거나 '틀린' 해석들이 많아집니다. 그런 점에서 차원을 넓혀보면 좋겠다는 말씀를 드리는 겁니다.
근대의 초극은 실현불가능한 것을 단지 몽상적으로 구상해본
지식의 이념적 유희였다고 볼 수 있나요?
일본의 대륙침략은 근대의 초극 사상의 실현이 아니었습니까? 초극사상과 일제의 폭력은 어떤 관계가 있다고 봅니까? 전쟁 발발에서 희열을 느낀 자들은 이후 반성을 했습니까?
전후에 근대의 초극 사상가들은 일본 제국 폭력의 현실을 알고, 할복이라도 해야 했던 것 아닙니까?
이 사례를 보면,
서양적 근대화, 서구주의를 극복한다는 과제가
서양적인 것 이상의 비극을 초래할 수 있다는 역설적 반면교사의 사례를 보여주는 것입니까?
일본이 보여준 것이 그런 것 아닐까요?
서양적인 것에 대한 극복이 야만이 될 수 있다!
이 글이 다케우치 요시미의 철학을 짧게나마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될 듯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