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년]만주에 대한 이토 히로부미의 선견지명? Le monde

[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


일본 제국의 역사에서 만주는 수렁의 입구가 될 것이었다. 일단 만주에 발이 빠지면서, 일본은 화북,내몽골,화남 그리고 인도차이나,동남아 등지로 끊임없는 확장을 계속하게 되었다. 이 침략이라는 수렁은 미국과의 충돌의 원인을 제공했다.

러일전쟁 이후 만주에서, 일본의 침략정책과 미국의 문호개방 정책이 정면 충돌했고, 이 충돌이 장래의 태평양전쟁의 씨앗이 된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렇게 만주가 이후 역사에게 화근이 된다는 것을 고려할때, 러일전쟁 직후의 이토 히로부미의 만주 인식은 선견지명이라 평가할 수 있다. 

남만주의 육군 당국이 지배를 강화하면서, 미국의 만주 문호개방정책과 충돌하면서, 미일 관계를 손상시키게 되자,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 문제에 개입, 다음을 주장했다.


<1906년>

5월 22일
일본 수상 관저에서, 만주 문제에 관한 협의회,

  - 그럼에도 관동도독부와 육군 당국이 이러한 정황을 무시하고 남만주에 대한 육군의 지배를 강화하려 하자, 이토와 이노우에 등 겐로(元老)는 가토 다카아키 외상을 지원, 만주 문호의 성실한 개방을 주장하고 나섰다. 미 • 영의 금융 지원이 무엇보다도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군 당국과 정부가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자, 이토는 결국 겐로 • 정부 , 육해군의 최고 수뇌 회의의 소집을 요구했다; 1906년 5월 22일 수상 관저에서 열린 이른바 ‘ 만주 문제에 관한 협의회’가 바로 그것이다.
이 모임에는 이토를 비롯한 ‘겐로’ 전원과 사이온지 수상을 비롯하여 하야시 외상, 사카다니 장상 등 각료,그리고 고타마 육군 참모총장을 비롯한 군 수뇌 등이 참석했다. 먼저 발언은 이토가 시작했다.

(6) 미 • 영의 지원이 절실한 처지에서 만주 문호를 폐쇄하여 그들을 적(敵)으로 돌리는 것은 ‘자살적 정책’이라는 요지였다. 그 뿐만 아니라, 만주에서 보이고 있는 일본의 행동은 청국 정부와 인민의 불만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 이대로 계속한다면 북청뿐 만 아니라 결국 청국 21개성의 민심을 반일 反日로 치닫게 할 것 이라고 역설했다.
이와 관련해 야마가타 • 데라우치 • 고타마 둥의 생각은 달랐다. 러시아의 보복전에 대비해야 하는 처지에서 현지 군인들에 따른 시책이었던 만큼, 다소 지나쳤을 수는 있겠지만 별반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대응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토는 이에 승복하지 않았다. 이미 강화조약이 체결되어 평화가 회복된 상황에서 여전히 전시적 군정을 계속하는 잘못을 통렬하게 지적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회의가 끝날 무렵 고타마가 ‘만주 경영’이라는 말을 하며 “만주에서 주권을 누군가 한 사람에게 맡겨…… 일체를 지휘하는 관아 官衙를 새로 조직하면 어떨까” 운운하자, 결국 이토의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7) “고타마 참모총장 등은 만주에서 일본의 지위를 근본적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통렬한 첫 반박이었다. “만주 방면에서 일본의 권리는 강화조약에 따라 러시아로부터 양도받은 요동반도 조차지와 철도 외에는 무 것도 없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만주 경영’이라는 말은 전쟁 진행 때부터 우리가 널리 쓰고 있었지만,만주는 결코 우리의 속지 屬地가 아니다. 순전한 청국 영토의 일부일 뿐이다. 속지도 아닌 땅에 우리 주권을 행사할 도리는 없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즉, "만주는 청의 영토이며, 일본이 주권을 행사할 근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참고-

최문형, 일본의 만주 침략과 태평양전쟁으로 가는 길 : 만주와 중국대륙을 둘러싼 열강의 각축, 지식산업사, 2013. 3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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