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년]장개석이 체임벌린의 유화정책을 환영한 이유? Le monde

[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


[장개석] 

장개석은 나치 독일에 대한 서양의 유화정책을 환영했다. 왜냐하면, 1938년에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하면 극동의 위기에 국제사회의 개입을 추진하던 중국의 노력에 치명타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소련,영국,미국이 유럽에서 전쟁에 휘말리면, 그들은 극동에서 일본을 상대할 의지를 덜 가지게 될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당의 기관지 <<중앙매일뉴스>>는 뮌헨협정을 찬양했다. 

 모스크바의 관점에서, 장개석의 중국 정부의 태도는 소련 정책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1938년에 체코슬로바키아 위기가 고조되자, 모스크바는 런던과 파리를 설득, 프라하와 모스크바와 함께, 히틀러의 난폭한 요구에 저항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장개석 정부는 모스크바가 반대하는 바로 그 유화정책에 찬성했다. 중국의 유럽 정책은 장개석의 목표에 대한 소련의 의심을 증폭시켰고, 소련 지도자들이 그에 대해 분노하게 만들었다. 중국에 대한 소련 원조의 수준을 고려해서, 소련 지도자들은 장개석으로부터 서양의 유화정책에 대한 지지 이상의 것을 기대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뮌헨 위기가 서양 민주주의 국가들과의 집단 안보라는 소련 정책을 파산으로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소련은 나치 독일과 타협을 추구하게 되었다. 1939년 봄, 소련과 독일 간의 포괄적 협상이 이미 진행 중이었다. 소련 정책의 변경은 모스크바에 대한 중국의 가치를 감소시켰다. 원래, 모스크바에 국민당의 중국의 지원은 영국-미국-소련의 안보 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일단 모스크바가 나치 독일과 타협을 선호하면서, 서양과의 협력을 포기하면서 소련과 중화민국을 결속시켰던 동기가 사라졌던 것이다. 

John W. Garver, Chinese-Soviet Relations, 1937-1945: The Diplomacy of Chinese Nationalism, Oxford University Press; 1 edition (September 8, 1988),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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