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정과 모택동 그리고 코민테른" Le monde

[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


모택동이 중국공산당의 당권을 장악한 것은 코민테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 해도, 적어도 코민테른의 지원이 없이 장악했다. 

1934년 말의 대장정 시작 이전의 화남의 장시 성 소비에트에서 마오는 당 최고 지도자 자리를 박탈당했다. 그런데, 일단 대장정이 시작되고, 중국공산당 정치국과 코민테른 간의 무전 접촉이 두절된 것이 1935년 1월의 쭌이 회의에서의 모택동 승리에서 결정적이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쭌이 회의(遵義会議)는 1935년 1월 중국 구이저우 성 북부의 도시 쭌이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회의를 말한다. 장제스의 제5차 공산 토벌전에서 패배하여 괴멸직전 도주하던 중국 공산당은 장시 성을 출발해 북서쪽으로 퇴각하는 장정을 단행했는데 이 회의는 장정 도중에 열렸다. 이 회의에서 그때까지 공산당의 권력을 장악하던 28인의 볼셰비키 그룹의 보구와 오토 브라운 등 '친 소련파'의 노선이 비판당했고 국민당과의 전투에서 실패한 책임을 물었다. 반대파이자 당초부터 농민을 기반으로 한 유격전술을 주장하던 마오쩌둥이 권력을 잡게 되었고 당권과 군사지도권을 장악하고 장정을 이끌게 되었다.

1935년 10월에 대장정이 종료되고, 산시 성 북쪽의 바오안에 도착했음에도, 모택동은 거의 1년 동안이나 코민테른의 신노선은 장개석 같은 반파시즘 부르주아와의 항일 통일전선 구축에 저항했다. 

코민테른이 제7차 대회에서 반파시즘 인민전선 노선을 결정한 1935년 7월에, 모택동의 공산당은 대장정 중이었다. 따라서 마오는 신노선을 알 수 없었다.

산시 성 도착 이후, 모스크바와의 무선 통신이 복구되고, 코민테른의 결정이 알려졌음에도 해석의 차이는 계속되었다. 35년 7월의 7차대회의 원래 결의 사항은 일본의 하수인 장개석을 배제한 통일전선의 구축이었다. 중국 공산당 주도의 통일전선 구축이 결정된 것이다. 하지만 이후의 논의 과정에서 코민테른의 중국 정책이 수정되었고, 이것이 혼돈의 씨앗이 되었다.  7차 대회 이후, 코민테른의 중국공산당 대표단은 장개석을 포함하는 국민당-공산당의 통일전선 구축 문제를 다시 검토했고, 같은 해 11-12월에 장개석을 포함하는 통일전선을 새로운 정책으로 확립시켰다.  

모택동과 코민테른은 중국의 통일전선 구축을 두고 갈등한 것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였다. 코민테른은 장개석을 포함한 통일전선 구축을 지시했지만, 마오는 수정 사실을 무시하고, 제7차 코민테른 대회의 결정사항이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뿐만아니라, 양측은 1936년 6월의 남서 군벌이 장개석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사건과 1936년 12월 장학량이 장개석을 납치한 시안 사변에 대해서도 갈등했다. 시안 사변에 대해서 모택동은 처음에 장개석을 제거할 기회로 간주했지만, 장개석의 무사 석방을 관철시킨 것은 소련 스탈린과 코민테른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코민테른 지도부(스탈린,드미트로프,왕밍)은 모택동을 반항하는 공산주의자로 의심했다. 코민테른의 시각에서 모택동은 국제 노동자운동의 강철 규율을 받아들이기 거부하는 반항자였다는 것이었다.

코민테른과 모택동의 사이가 벌어진 만큼, 스탈린과 장개석의 관계는 가까워진 것인가?  시안 사변에서 장개석을 구한 것은 스탈린이었고, 1937년 중일전쟁 발발부터 1939년 9월의 독소불가침 조약 체결 이전까지 소련은 장개석의 중국에 대한 최대 후원세력이 되었다. 


참고- 

John W. Garver, Chinese-Soviet Relations, 1937-1945: The Diplomacy of Chinese Nationalism, Oxford University Press; 1 edition (September 8, 1988), 13.

다음 사건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대장정, 코민테른과 모택동 갈등, 쭌이 회의, 코민테른 7차대회, 인민전선, 시안사변, 국공합작, 장개석-스탈린 동맹, 중일전쟁, 독소불가침조약 그리고 1960년대의 중소분열...



덧글

  • 까마귀옹 2018/09/08 11:19 # 답글

    역사의 가정은 없다지만,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승리했다면......'중화민국'과 미국, 소련의 관계가 아주 재미있게 돌아갔을 것 같습니다.
  • 파리13구 2018/09/08 13:19 #

    한국전쟁은 없었을 것으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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