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년] "일본은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Le monde

[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



하타 이쿠히토에 따르면, 1937년 중일전쟁은 일본이 도발한 것이 아니라, 말려든 것이다. 37년에 일본은 중국에서의 전면전을 계획하지도 원하지도 않았지만, 작은 충돌이 전면전으로 비화되고, 장기적인 소모전으로 발전해 나갔다는 것이다. 

37년 7월 북경의 마르코 폴로 다리에서 최초의 교전이 발생했을 때, 일본 육군은 점점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알게되었다. 당시 육군 참모본부 작전부장이었던 이시하라 간지는 “스페인 전쟁에서 나폴레옹이 겪은 것처럼 끝없는 수렁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중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화북의 일본 육군의 중국 주둔군은 5천에서 6천 명 규모로 여단급에 불과했다. 상하이의 해군은 4천 명 규모에 지나지 않는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정도의 준수한 수준의 병력 배치는 당시 일본의 군사 계획이 중국을 주적으로 간주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1936년 육군 참모본부는 중국 주군둔에게 소련을 상대로 한 군사훈련을 실시할 것을 명령했다. 말하자면, 1937년에 마르코 폴로 다리에서 처음으로 교전한 일본 부대는 중국이 아닌, 소련을 상대로 싸울 준비가 되어 있던 부대였다. 

1937년에 중일전쟁이 확대 되면서, 일본의 원래 계획은 빠르게 공격하여, 소수의 주요 거점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1931년의 만주와 1932년 상하이의 경험을 통해서 볼 때, 전면전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 전망되었고, 지역 주둔군과 추가 파병에 대한 협박 만으로 중국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일본은 믿었다. 그정도로 공격하면, 국민당 정부가 일본에 유리한 조건으로의 휴전을 구걸할 것이라 그들은 예상했다.


출처-

IKUHIKO HATA,. (1989). Continental expansion, 1905–1941. In P. Duus (Ed.), The Cambridge History of Japan (The Cambridge History of Japan, pp. 271-314).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319.


-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에서 장개석의 대일 항전의지에 차이가 존재했다면,

그것은 스탈린의 소련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36년의 시안 사변에서 장개석은 스탈린의 지원을 약속받았고, 소련의 원조에 대한 기대 아래 일본의 도발에 대해 자신있게 대처할 수 있었다.

소련의 관점에서도, 극동의 일본을 중국과의 전쟁의 수렁으로 몰면, 시베리아 국경의 안전이 강화된다고 기대할 수 있었다.

또한 중국군 훈련을 지원했던 나치 독일 고문단도, 일본과 대적할 정도로 중국군의 훈련이 진전되었다고 조언했다. 

37년에 장개석이 달라진 것이었다. 




덧글

  • 포스21 2018/08/29 16:43 # 답글

    뭐 일본이야 안싸우고 공짜로 얻기를 원했겠죠.
  • 파리13구 2018/08/29 17:11 #

    장개석이 이정도로 끈질게 저항할지 미처 예상 못했습니다.

    과거의 장개석이 아니었죠. ㅠㅠ
  • 에르네스트 2018/08/29 17:14 # 답글

    뭐 미국대상으로 내가 싸대기 한방때리면 울면서 자비를 구하겠지? 하길레 뭔정신으로 그러나?(그리고 미국은 빡쳐서 개패듯 패서 일본이 제발목숨만! 하게 만들었고) 했더니 중국대상으로도 그렇게 생각했군요?
  • 파리13구 2018/08/29 17:13 #

    31년과 37년의 차이는

    소련의 원조입니다. ^^
  • 무지개빛 미카 2018/08/29 18:56 # 답글

    이 와중에 큰 활약을 하신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대일본제국군 육군 안에 있던 대한독립군 장군 무다구치 렌야.

    "중일전쟁의 시작은 나 이니 이 대동아공영권을 위한 전쟁의 끝도 내가한다."

    대한독립군 무다구치 렌야 장군의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으며 임팔작전을 통해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대일본제국의 망상이 산산조각납니다.

  • 파리13구 2018/08/29 19:11 #

    ??
  • 무지개빛 미카 2018/08/29 19:29 #

    무슨 말인지 잘 모르시겠다면?

    중일전쟁의 시작인 1937년 7월에 일어난 노구교 사건은 무다구치 렌야가 대령이었고 당시 중국주둔군 보병 제1연대 연대장 일 때 일어난 사건이었으며 원인은 무다구치 렌야가 지휘하는 부대의 병사 1명이 급똥(!)을 못 참고 집합시간을 늦어버린 것을 중국군이 선제공격을 했다고 착각한 탓에 벌어진 참극이었다... 진짜로~ ㅅ.ㅅ

    그리고 임팔작전에 대해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겠지만, 무다구치 렌야가 중장으로 버마주둔군 15군 사령관일 당시 식당에서 맨날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을 부관이 기억하고 있었는데, "무다구치 중장은 평생 노구교는 내가 시작했다. 대동아전쟁은 내가 결말 짓는게 내 책임이다."라고 맨날 지껄였답니다.

    그걸 기억하고 있던 사람은 사이토 히로쿠니 소위, 임팔작전 직전 15군 사령부에 배속된 경리학교를 갓 졸업한 신참내기였습니다.

    그리고 대한독립군 무다구치 렌야 장군의 발언은 결국 임팔작전과 때를 같이한 사이판 전투로 인해 도죠 히데키 내각이 박살나고 일본이 B-29의 맹폭격에 노출되면서 사실이 되었다. 는 행복한 이야기~~

    참고 동영상

    NHK 다큐 '전율의 기록, 임팔작전'

    NHK 다큐 태평양전쟁전사 4부 책임없는 전장, 버마 임팔
  • 파리13구 2018/08/29 20:00 #

    대한 독립군??
  • 무지개빛 미카 2018/08/29 20:11 #

    한 때, 임팔작전의 화려한 (정말 화려한 대일본제국 육군 죽이기...)전과와 더불어 대한 광복군이 영국군 소속으로 참전한 역사 때문에 네티즌들이 (DC인사이드가 시작이라는 썰이 있습니다.)무다구치 렌야에게 붙여진 별명이었습니다.
  • 파리13구 2018/08/29 20:12 #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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