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대한 영국의 유화정책이 잠깐 실시된 적이 있다." Le monde

[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




이리에 아키라는 유럽에서의 나치 독일의 부상에 대해서와는 다르게, 극동의 일본의 부상에 대한 유화정책은 결코 진지하게 고려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Akira Iriye, The Origins of the Second World War in Asia and the Pacific, Longman Group,1993.   41.]

앤서니 베스트는 영국의 극동 정책에서 유화가 배제된 이유로 4가지를 들었다. 첫째, 일본에 대한 영국의 화해 정책이 미국을 소외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유럽에서 영국이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일을 망칠 수도 있었다. 
둘째, 영국이 일본을 동정하면, 후자가 소련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공포가 존재했고, 이 경우 유럽에서 독일을 견제하는 소련의 능력이 손상될 것이었다. 
셋째, 영국 정보 당국은 유럽에 전쟁이 발발하지 않는 이상, 일본이 군사적으로 위협이 되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일본은 후진적 군사력을 가지고 있으며, 동북 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두고 소련의 견제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일본에 대한 유화가 중국을 화나게 만들 수도 있었고, 중국에서의 영국의 경제적 이익에 해가 될 수도 있다고 간주되었다. 

[Antony Best , Imperial Japan, in Robert Boyce,‎ Joseph A. Maiolo (eds.), The Origins of World War Two: The Debate Continues,  Palgrave; 2003, 63.]

영국의 대일정책에서 유화의 부재에 대해서는 앤서니 베스트,이언 니시, 그리고 데이비드 레이놀즈와 같은 역사가들도 같은 입장이다. 그들은 영국은 일본에 대한 유화정책을 결코 고려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다만, 1940년 6월에 나치 독일이 서유럽을 석권하고,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했으며, 본토의 섬에 고립된 직후에 영국은 잠시 유화정책을 실시한 적이 있다고 한다.  

당시 영국은 일본의 요구에 따라, 중국의 장개석에 대한 보급로인 버마 통로를 1940년 7월부터 10월까지 잠시 폐쇄한 적이 있고, 이를 잠깐동안의 유화정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와는 다르게, 영국은 중국에 대한 물자 보급로를 한시적으로만 폐쇄했고, 시한이 지나자 공급을 재개했다.

이 예외를 제외하면, 영국은 일본에 대한 유화정책을 결코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 영국 역사학의 주류적 해석이라 할 수 있다. 

[Michael Barnhart, ‘The Origins of the Second World War in Asia and the Pacific: Synthesis Impossible?’, Diplomatic History (1996), vol. 2, 260]

만약 영국이 극동에서 일본에 대한 유화를 실시하려 했다면,

미국이 곧바로 나서서 항의했을 것이다. 

"주축국과 싸우고자 하는 의지가 박약한 것 아닙니까?" 

그러면서 미국이 영국에 대한 군사 지원을 약간 줄이기라도 한다면, 영국에게는 재앙이 되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전쟁의 특정 단계에 가면, 일본에 대한 영국의 유화정책은 불가능한 선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다른 각도에서 보면, 미국도 마찬가지 였다. 41년, 미일협상이 성사되고, 미국이 일본에게 양보했다면, 영미동맹에 큰 균열이 발생했을 것이다.

이렇게 주축국과 연합국의 동맹관계 때문에, 각 진영의 국가들의 정책의 자율성은 제한을 받았다. 

41년의 미일협상에서 , 미국과 일본의 차이가 있었다면, 일본은 국익을 위해서 삼국동맹을 파괴할 의도가 있었지만, 미국은 영국,중국과의 동맹을 배신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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