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


미국을 유도해서 일본과의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던 입장을 취하도록 한 것은 누구였는가?
장제스는 실제로 자신이 미국의 태도를 강경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미미했다고 하더라도, 장제스는 41년의 미일협상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물론 영국의 처칠이 장개석 보다는 더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볼 수 있다. 41년에 처칠과 더불어 중국의 장개석은 미일협상의 결렬을 원했다. 만약 미일 협상의 성사가 미국이 중국에서의 일본의 기득권을 인정한 것에 기초했다면, 그것은 장개석에게 외교적 재앙이 되었을 것이다. 이는 미국-영국-중국-소련의 연합국 진영의 균열을 초래했을 것이다.
장개석은 41년 11월의 일기에서 다음을 주장했다.
“일본에 대한 미국의 제안은 전적으로 나의 요구에 기초한 것이다. 과거의 타협적 분위기와 비교할 때 근본적인 태도 변화가 일어났다. 어젯밤 나의 가족과 측근들이 걱정과 분노에 휩싸여 있을 때,나는 그들에게 외교에서 매우 특별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누가 오늘의 나쁜 소식이 내일의 좋은 소식이 되지 않으리라고 확언할 수 있겠는가? 지금 그 말이 실현되었다. 이것은 진실과 이성이 승리를 거둔 [경우다.] (1941년 11월 27일).
[레이 황, 장제스 일기를 읽다, 푸른역사,2009. 241-242.]
진주만 사건 이전부터,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당시에 장개석을 흥분시킨 것은 11월 9일 미국 육군부와 해군부에서 그에게, 적어도 12월 10일까지는 극동에서 미국의 군사행동을 위한 준비가 완료될 것이란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난 8년 동안 장개석은 미국과 영국의 상대적 외면 속에서 일본과 고독한 전쟁을 진행 중이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은 이제 장개석의 고독의 세월이 끝났음을 요란하게 알리는 사건이었다.













덧글
그나저나 국민혁명 초기 장개석과 영미의 관계는 중일전쟁 중기까지 백마 타고 달려올 영미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장개석의 모습과 참으로 재밌는 비교거리입니다.
진주만 아니엇으면 그시기가 아주 늦어졋겟지요
주미 중국 대사였던 중국인 전략이 저거더군대-요.
중국은 일본의 할복을 돕는 역할을 하기 위해
일본과 적극적으로 싸워야한다고
그래야 미국이 참전해 일본이 망한다고
이에 대해 왕조명은 그렇게 되면 일본은 망하지만
중국은 공산당이 차지하게 된다고 일본과 싸우면
안된다는 주장
꽤 똑똑한 중국인들이더군
미래를 내다 본다는 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