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년]루스벨트의 일본 해상 봉쇄 계획? Le monde

[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


37년 중국에서의 일본의 도발에 대해서 루스벨트의 정책이 방관에 가까웠다는 해석이 존재한다. (강준만,미국사 산책 6 : 대공황과 뉴딜혁명)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에 아키라에 따르면, 1937년 말에 미국의 일본 정책에 중요한 변화의 조짐이 있었다고 한다.  

같은 해 9월의 시카고에서의 이른바 ‘차단,격리(quaratine)' 연설에서 미국 대통령은 전염병처럼 번져가는 전쟁을 막기 위해 침략자들을 국제사회에서 '격리' 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에 대한 우회적 경고였다.

경고가 있었음에도, 일본은 12월 12일에 미국 경비정 파나이 호를 격침시켰고, 12월 13일에는 중국의 수도를 남경을 함락시키고, 대학살을 자행했다.

이 두가지 사건에 직면한 루스벨트는 미국과 영국 해군의 참모 회담을 시작하는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미 영국은 아시아 -태평양에서의 일본 해군의 위협에 맞서서 영미의 해군 협력을 준비하자고 제안한 바 있었다. 

심지어 미국 대통령은 일본에 대한 영미 합동 해상 봉쇄를 검토했다. 미국과 영국의 함대를 서태평양에 전진 배치해서 일본 해군을 견제하고, 일본이 필리핀과 싱가폴 방면으로 도발하지 못하도록 해상 봉쇄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봉쇄로 인해서 전쟁이 발발할 수 있다고 우려한 런던이 물러서면서, 봉쇄방안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루스벨트가 태평양에서 영국과의 군사적 전략적 동맹을 구상하기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이후의 영미 군사동맹의 맹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참고-

Akira Iriye, The Origins of the Second World War in Asia and the Pacific, Longman Group,1993. 49-50


1937년의 미국의 일본정책의 성격은 무엇이었는가? 

강준만 식으로 보면, 미국의 정책은 유화정책에 가까운 것처럼 보이며,

이리에 아키라에 따르자면, 37년 말부터 미국의 정책은 봉쇄 기조를 유지했고, 진주만 사건에 이르기까지 그 봉쇄의 수준을 단계적으로 높이면서, 일본 제국의 숨통을 점점 조인 것이 된다. 



덧글

  • 2018/07/31 21:36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8/07/31 23:07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8/07/31 23:08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전위대 2018/07/31 21:32 # 답글

    1931년 금주 공격으로 촉발된 스팀슨 독트린 시점부터 미국이 일본에 대해 방관 혹은 일방적 유화정책을 취했다는 것은 오류라고 봐야죠.
  • 파리13구 2018/07/31 23:07 #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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