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


상식적으로 보면, 공산주의를 지지하면, 소련과 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역으로, 반공주의자라면, 소련에 대해서 적대감을 가져야 한다는 논리를 주장하는 것이 지당하다.
그런데,
역사가 존 가버에 따르면, 1936년 12월의 서안사변에서 장개석 세력이 얻은 교훈은 독특했다. 즉 "반공주의는 친-소련 pro-Sovie 일 수 밖에 없다."
시안사변을 통해서 중국 국민당은 일본과의 전쟁을 향해 전진해 갔다. 사건을 통해 그들이 얻은 결론들 중 하나는 모스크바가 중국공산당을 억제하는데 자신의 영향력을 기꺼이 발휘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시안사변을 전후로 한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모스크바는 중국공산당의 정책을 온건하게 만드는데 적극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모스크바가 난징의 장개석과 함께 일본에 저항해서 싸우고 싶어한다는 점과 더불어, 중국공산당에 대한 모스크바의 영향력이 몇몇 국민당 지도자들이 일본과의 전쟁이 초래할 위험이 국민당의 소련 동맹이 중국 공산당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억지력 덕분에 상쇄가 가능하다고 판단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시안사건에서의 소련의 역할은 "반공주의는 친-소련 pro-Sovie 일 수 밖에 없다."는 명제를 확인시켜 주었고, 몇몇 국민당 지도자들이 이 논리를 수년동안 주장하게 되었다.
일본과의 전쟁에서 소련이 지원할 것이며, 모스크바가 중국공산당에 대해서 억지력을 행사할 것임을 확신한 국민정부의 장개석은 1937년 7월에 도쿄가 시비를 걸어왔을 때, 과감하고 단호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참고-
Garver, John W. "The Soviet Union and the Xi'an Incident." The Australian Journal of Chinese Affairs, no. 26 (1991),p.175.
장개석의 국민당은 이미 1936년에 소련과 중국공산당의 이해관계가 상충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즉 소련과 공산주의를 구분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을까?
이는 이후 조지 캐넌의 논리를 연상시킨다. 존 루이스 개디스에 따르면, 조지 캐넌이 제안한 봉쇄정책의 대상은 소련이었고, 공산주의가 아니었다. 즉 트루먼 행정부의 정책은 1947-1950년 동안 세계 공산주의 운동을 단일대오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공산주의가 미국의 봉쇄 대상은 아니며, 소련에 추종하는 공산주의만이 정책이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모스크바에 복종하는 것이 봉쇄의 목표물이었지, 맑스-레닌주의를 추종하는 것이 대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적으로 공산주의라 하더라도 소련의 지도력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체제는 심지어 미국의 원조를 기대할 수도 있었다. 모스크바의 사주를 받지않는 토착 세력의 공산주의와 미국이 손을 잡을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냉전 시대의 조지 캐넌이 이 논리를 중국 공산당을 소련으로부터 이탈시키기 위해 사용했다면, 장개석 세력은 소련과 손을 잡아서, 중국공산당을 견제하기 위해서 유사한 논리를 구사한 것인가? 조지 캐넌과 장개석 모두, 소련과 중국공산당이 다른 이해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여기서 장개석의 논리란, 소련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국내에서 반공주의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즉 스탈린의 소련은 자신의 국익을 위해서라면 모택동의 중국공산당의 뒤통수를 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덧글
일련의 과정에서 코민테른 고문 오토 브라운이 모택동의 반장항일 노선에 보였던 극도의 반감이나 이후 1938년 주중 소련군사고문단장으로 부임한 추이코프가 모택동에게 취한 비판적 시각, 서안 사건 당시에 스탈린이 지체없이 장개석을 석방할 것을 지시한 것 등을 고려한다면 소련이 중국 공산당의 혁명역량을 낮게 평가하고 차라리 국민정부와 연대하는 것이 일본의 극동 침략을 막을 수 있는 효과적인 길이라 인식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죠.
소련에 대한 접근은 이러한 국민정부의 대일정책을 기반으로 하는데 코민테른 및 소련과 중공의 이해상충을 이용할 수 있다는 깨달음은 소련에 대한 접근에 또 다른 정당성과 명분을 부여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