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는 때로는 역설 덩어리라 할 수 있다. 상식적으로 보자면, 반공투사 장개석과 공산주의의 수장 스탈린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실제로 그랬을까?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소련의 국익이 충돌할 때의 스탈린의 선택은 어떤 것이었는가?
1936년 12월이면, 중국 장개석의 공산당 토벌이 상당히 진전된 상황이었고, 승리가 눈앞에 온 것처럼 보였다.
그런 가운데, 그 해 12월 12일에 발생한 것이 바로 시안 사건(서안 사변)이었다. 시안 사건이란, 동북군 총사령관 장쉐량이 국민당 정권의 총통 장제스를 산시 성의 성도(省都) 시안(西安) 화청지에서 납치하여 구금하고 공산당과의 내전을 중지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함께 싸울 것을 요구한 사건이다.
리처드 번스타인에 따르면, 시안 사건에 환호한 것은 엔안의 모택동이었고, 그는 장개석 일당 제거를 위한 스탈린 동지의 허가를 구했다.
하지만, 시안 사건에 대한 스탈린의 입장은 무엇이었나? 장개석의 죽음 가능성에 전율한 것은 바로 소련 스탈린이었다. 중국공산당에 대한 스탈린의 명확한 지령은 장개석과 화해하고, 그의 무사 석방을 위한 교섭에 나서라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장개석의 죽음으로 중국 공산당이 볼 이익이 미미할 것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허잉친 He Yingqin의 도움을 받아서, 왕징웨이 Wang Jingwei 가 정권을 잡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징웨이가 주도하는, 친일파 중국의 대두만큼 당시 소련에 더 큰 위협이 될 것이 없었다. 36년 11월의 독일과 일본의 방공협정 the Anti-Comintern Pact 으로 인해서 소련은 양면전쟁, 즉 동쪽에서의 독일이, 서쪽에서는 일본이 양면 전쟁을 도발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장개석은 반공협정 가입을 진지하게 고민했지만,가입하지 않았다.] 만약 중국마저 주축국에 가입하면, 소련은 동맹국 없이 양면전의 위협에 직면해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스탈린이 1930년대 동안 소련군의 엘리트 장교들 다수를 숙청했기 때문에, 전쟁은 소련에게 재앙이 될 것이었다.
따라서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장개석이 중국의 권좌에 머물러야만 했다. 장개석은 반공투사 였음에도, 1933년에 소련과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반-일본파였다는 점이었다.
참고-
Rana Mitter, China's War with Japan, 1937-1945: The Struggle for Survival , Penguin Books Ltd (May 8, 2014),pp.6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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