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담 누,베트남의 반공투사,페미니스트?" Le monde

[1900년] 미국에게 필리핀은?


마담 누(쩐레수언) 

마담 누는 고딘디엠의 동생, 고딘누의 아내였지만, 디엠이 독신이었기 때문에, 의전상으로 마남 누가 베트남의 퍼스트 레이디가 되었다. 서양에서는 그녀를 용의 여인 "Dragon
Lady" 혹은 "베트남을 지배한 남자를 지배한 여자"라 불렸다.

베트남의 명문 집안 출신이었다. 친가와 외가의 할아버지 모두 왕실의 고위 관리였다.  아버지는 훗날 남베트남 정부의 초대 주미 대사를 지냈고, 어머니는 베트남의 마지막 왕인 바오다이왕의 사촌 누이이다.

1943년, 하노이의 프랑스 고교를 졸업한 후, 디엠의 동생 누와 결혼했고, 불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그녀에게 제1언어는 프랑스어였고, 모국어임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어로는 쓸 줄 몰랐다. 

매우 영리했고, 에너지가 넘치는 여성이었던 마담 누는 디엠 정권 하에서 막대한 권력을 행사했다. 이는 부분적으로 디엠과 그녀의 남편 누에 대한 영향력 덕분이었으며, 그녀의 조직 역량 덕분이기도 했다. 

마담 누는 반공주의 준군사 조직, 베트남 여성 연대운동 Vietnamese Women's Solidarity Movement 을 운영했고, 이 조직은 주로 공무원들 부인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를 통해 정부의 각종 조직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자신의 정치력을 통해서 마담 누는 의회를 통해 각종 법안을 통과시켰다. 가령, 가족법과 도덕성 보호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을 통해서, 일부다처제,이혼,춤, 미인선발대회, 도박, 사주팔자, 투견, 피임기구 사용, 불륜,매춘 등이 금지되었다.  마담 누의 여성 조직에 여고생 및 여대생들이 가입을 강요받았지만, 대부분은 자발적으로 가입했다. 왜냐하면, 조직이 주장하는 페미니즘,도덕주의,이상주의와 힘 때문이었다.

매력이 있었고, 미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남 누는 각종 망언으로 디엠 정권의 인기 하락에 결정적이었다. 특히 63년 6월의 승려 틱꽝득 분신에 대한 그녀의 조롱은 결정적이었다.  8월 1일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마담 누는 불교도들이 승려 한명을 바베큐로 만들었고, 심지어 수입 석유를 가지고 바비큐로 만들었다고 조롱했다. 

미국의 케네디 정부는 고딘누와 마단 누의 국정농단 행위에 대해 더이상 방관할 수 없었다. 63년에 새로 사이공의 미국 대사로 부임한 롯지 대사가 디엠을 만났을 때, 롯지는 고딘누와 마담 누를 정부 요직에서 물러나게 하라는 요구를 했다. 롯지 대사는 많은 미국인들이 남베트남의 지도자가 마남 누인지 착각하고 있다고 농담했다. 이에 대해서, 디엠은 마담 누의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본인은 마담 누에게 자주, 결혼해서 그녀의 영부인 지위를 박탈하겠다고 협박하고 있다고 답했다고 한다. 

남베트남에서 지엠 정권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서 공산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동정심이 고조되자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이끄는 미국 정부는 같은 해 중앙정보국(CIA)과 남베트남군을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켜 지엠 정권을 붕괴시켰다.

이 쿠데타 직후 지엠과 동생인 응오지엠누는 쿠데타군에게 처형됐으며, 이에 따라 수언의 운명도 전기를 맞게 됐다.

쿠데타 당시 마담 누는 장녀와 함께 외국을 순방 중이었다. 덕분에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지만, 군사정권을 마담 누의 재산 몰수와 영구 귀국 불가를 결정했다. 

이후 마담 누는 유럽을 떠돌다가 결국 로마에 정착, 쓸쓸한 여생을 보냈다. 마담 누는 2011년 4월  이탈리아 로마에서 노환으로 숨졌다. 향년 87세.  









덧글

  • 라라 2018/07/31 23:09 # 답글

    재산을 해외로 빼돌려 둔 모양이군요. 이탈리아에서 잘 산 걸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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