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년, "영국은 왜 유화정책을 선택했는가?" Le monde

"김정은이 냉전을 끝낼 수 있을까?"



개설서적 수준의 지식차원에서, 영국의 유화정책은 다음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다.

1. 경제적 배경

대공황의 여파로, 전간기 동안 영국 경제의 상황은 매우 열악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후유증과 1929년의 세계 대공황이 영국 경제에 치명타를 가했다. 

경제적 난관에 직면한 영국 정부는 또 한번의 전쟁을 감당할 능력이 되지 않았다. 또 한번의 전쟁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반면, 히틀러 나치 통치 하의 독일은 경제 부흥을 마음껏 선전했다. 

따라서, 약한 경제 상황을 고려할 때, 영국의 유화정책은 최선의 정책으로 보였다. 

2. 영국의 반전 여론.

제1차 세계대전의 공포가 여전히 생생했다.

당시 영국의 한 보궐선거에서 영국의 재무장을 주장한 보수당 후보가 유화를 지지한 노동당 후보에게 참패했다. 이는 영국민이 전쟁에 반대했음을 보여주었다. 

국제 안보를 위해서 영국은 국제연맹의 집단안보체제에 의존했다.

영국의 미디어도 유화를 지지했다. 미디어의 평화공세에 영국 독자들은 세뇌 당했다. 당시 영국의 주요 신문 더 타임즈와 메일지는 친-유화정책 입장이었다.

3.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영국 정부의 입장

영국 정부는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에게 지나치게 가혹했다고 생각했다. 영국의 유화정책 지지자들은 베르사유가 독일을 너무 가혹하게 처벌했기 때문에, 수정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더불어 명백했던 것은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의 수정을 원하며, 독일의 불만을 수용하는 것이 정통성있다고 인정되는 이상, 영국 외교정책이 이를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독일의 정당한 불만에 대한 유화정책은 강대국이 외롭고 허약한 나라에 베풀 수 있는 시혜적 조치로 해석 가능했다.이러한 관점은 유화정책을 상대적 힘의 지위의 관점에서 보도록했고, 비겁한,바보같은 어리석인 것으로 보이지 않게 했다. 

영국의 총리 출신 로이드 조지 Lloyd George는 유화정책이 프랑스의 독일 혐오에 대한 필요한 교정책이라 보았다. 그리고 영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독일에 대한 유화정책이 경제적으로 의미있다고 보았다. 1920년, 케인스는 <평화의 경제적 결과>라는 영향력있는 글을 통해서, 베르사유 조약에서의 보상 조항이 독일에 가한 재정적 요구가 국제무역과 결제 체제에 거대한 해악을 가할 것이고, 독일 경제를 불안하게 만들고, 독일 경제의 붕괴를 이끌 것이라 경고했다. 그리고 이 예언이 실현되자,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에게 가한 경제적 고통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는 것이 적어도 논리적인 것이 되었다. 1) 

따라서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히틀러의 수정 요구는 영국에게 이유있으며,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라고 판단되었다. 가령, 라인란트 점령은 히틀러가 자신의 뒷마당에 간 것에 불과하다고 보는 입장도 있었다.

안슐루스, 즉 나치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은 국민투표 결과에 따른 것으로, 오스트리아 국민이 원한 것으로 해석 가능했다. 

영국 또한 히틀러의 독일과 여러 협정을 체결했다. (가령, 1935년 6월 18일의 영국-독일 해군 협정 Anglo-German Naval Agreement)

영국-독일 해군 협정은 영국과 독일이 영국 해군 대비 독일 해군의 규모를 재조정하는데 상호 합의한 것이다. 합의에 따라, 독일해군의 총 톤수는 영국해군의 총 톤수의 35%를 유지하게 되었다. (35:100) 독일은 영국-독일 해군 협정을 통해, 프랑스와 소련에 맞선 영국-독일 동맹교섭의 시작으로 만들려고 했고, 반면 영국은 이 합의를 통해, 독일의 팽창주의를 제한하기 위한, 군축 회담의 시작으로 만들려고 했다.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독일은 해군력보유가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독일과의 해군 협정으로, 베르사유 조약의 수정에 스스로 앞장선 꼴이 되었다. 

따라서 히틀러의 요구가 베르사유의 조약에 대한 수정에 한정되는 한도에서, 영국은 히틀러의 행동을 정면으로 막을 이유가 없었고, 전쟁을 벌일 일은 더더욱 없었다. 

4. 믿을만한 동맹국의 부재.

독일과 전쟁을 위해서, 영국은 믿을만한 동맹국이 필여했는데, 그런 세력이 없었다.

국제연맹을 중심으로한 집단안보가 파시즘의 부상을 억제하는데 실패하자, 영국은 유화 이외의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없었다. 

프랑스는 늘상 그랬던 것처럼 국내 정치가 분열 상태였고, 항상 그렇듯이 믿을만한 동맹국이 아니었다.  영국이 프랑스와 비밀리에 어떤 일을 하려할때, 그 비밀이 곧 누설되기 십상이었다. 

루스벨트의 미국은 고립을 선택했고, 유럽의 전쟁에 가담하고 싶지 않았다. 

소련은 빨갱이 세력이었고, 오히려 영국 보수주의 정치세력의 입자에서 독일과 히틀러 보다 더 근심의 대상이었다. 

이탈리아와 일본의 파시스트 세력은 국제 무대에서 이미 도발에 나선 상태였다. 

따라서 믿을만한 동맹이 없었던 영국은 유화정책을 추진할 수 밖에 없었다.    

5. 영국군의 준비 부족

1929년의 대공황과 제1차 세계대전의 희생 때문에, 영국의 군비지출은 낮은 수준이었다.

영국군 참모본부는 정기적으로 정부 보고에서 영국군의 약점을 부각시켰다.

열악한 경제상태에서 영국의 재무장은 매우 부담이 될 수 있었다. 

반면, 각종 선전선동 덕분에, 히틀러의 재무장은 실제보다 과대평가 되었다. 따라서 약체의 군대를 가지고 강력한 히틀러의 군대와 전쟁을 벌이는 것은 위험부담이 컸다.

따라서 영국에서 유화가 최선이었다. 

6.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

1920년대와 1930년대 세계평화를 더욱 위협한 것은 히틀러의 독일이 아니라 스탈린의 소련인 것처럼 보였다. 

체임벌린은 독일을 강하게 만들어, 소련 공산주의의 팽창주의에 대한 방패로 만들기 원했다.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 보다는 소련 공산주의를 더욱 두려워했다. 

무솔리니와 프랑코가 공산주의와 싸우는데 도움이 될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나치가 독일에서 집권할 때, 그들은 소련 보다 덜 폭력적인 것처럼 보였다. 

당시 영국 보수주의의 주류적 감성은 공산주의 보다는 히틀러주의가 더 낫다는 것이었다.  

7. 대영제국에 대한 근심.

불개입을 선호하는 당시 영국의 각종 주장들은 멀리 떨어진 곳의 말썽에 왜 영국이 개입해야 하는가에 대한 비판이었다. 

네빌 체임벌린은 양면 전쟁을 넘어선는 3면 전쟁의 가능성에 전율했다. 즉 영국이 극동에서 일본과 지중해에서 이탈리아와, 유럽에서 독일과 전쟁에 말릴 수도 있다는 점에 전율했다. 그것은 영국이 감당할 수 없는 3면 전쟁, 세계 전쟁이 될 위험이 있었다. 

체임벌린은 미국,남아프리카,호주,캐나다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들의 원조 없이, 영국은 3면 전쟁을 치를 수 없었고,

그 논리적 판단의 정책적 결과가 바로 네빌 체임벌린의 유화정책이었다. 

1) Frank McDonough, Neville Chamberlain, Appeasement, and the British Road to War, p.15




덧글

  • .... 2018/05/10 18:17 # 삭제 답글

    기본적으로 체임벌린 등 서구 정치가들은 상식선에서 행동했었고 히틀러가 미친 인간이었죠. 체임벌린의 선택이 결과적으로 틀린 거야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그가 잘못된 결정을 내린 배경에 대해 포스트에서 다룬 것처럼 생각해 봐야 정상이죠. 그게 안 되면 역사 속에서 뿐 아니라 경험 속에서도 뭘 배울 수 없을 겁니다.
  • 파리13구 2018/05/10 18:18 #

    테일러라는 역사학자는

    히틀러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고 까지 주장합니다. ㅠㅠ
  • .... 2018/05/10 18:23 # 삭제

    한편으로는 처칠이 뛰어나서 이 모든 것을 간파했다는 생각 보다는 처칠도 상또라이라 또라이를 알아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정상인이라면 아내가 일곱은 아니겠죠.
  • .... 2018/05/10 18:25 # 삭제

    그건 좀 무리한 주장 같기는 한데 '1945년 이전에 개전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라고 하면 받아들일 수 있겠네요.
  • 파리13구 2018/05/10 18:38 #

    테일러의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을 참고 바랍니다. ^^
  • 터프한 얼음대마왕 2018/05/10 19:52 # 답글

    1. '제국' 의 딜레마네요. 로마, 비잔티움, 몽골, 오스만, 청 제국 등. 체임벌린의 유화정책 이면은... '제국' 의 말년을 보는 것 같습니다.

    2. 코민테른 등. 공산주의 세력이 노조-언론-지식인 등. 사회 전반적으로 퍼져나가는 현상을 본다면... 유화정책 이유의 퍼즐 한 조각이 맞춰진 것 같습니다.

    3. 동맹국 부재, 내부 여론과 불안한 경제, 독일의 이미지 등. 누가 되어도 체임벌린의 선택은 피할 길이 없다는 걸 다시금 말합니다. 시간을 끌어볼려해도 히틀러... 오, 히틀러....

    4. 체임벌린이 욕을 거하게 먹은 것은 그가 일찍 죽었다는 것과 "이 종이에 평화가 담겨 있습니다!" 란 엄청난 명언과 그 평화조약이 적힌 종이를 든 체임벌린의 사진의 공이 크... 겟... 죠? 백 마디보다 한 장의 사진의 힘이 무섭네요.
  • 파리13구 2018/05/10 19:54 #

    감사합니다. ^^
  • 터프한 얼음대마왕 2018/05/10 19:55 #

    그런데 그 사진과 연설이 없었어도 욕은 많이 먹었겠죠?
  • 파리13구 2018/05/10 19:57 #

    평화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전쟁보다 어렵다고 봅니다.
  • 지나가던과객 2018/05/10 22:23 # 삭제 답글

    1차 대전 때 병사들 사망, 행방불명, 부상자를 양측 합치니 대략 3800만 명이 나오더군요.
    연합군 측은 사망자만 해도 550만명, 이러니 전쟁이라면 지긋지긋할테고, 히틀러도 당시 참전자였으니 전쟁은 안하겠지하는 마음도 없진 않았겠죠.
  • 파리13구 2018/05/11 00:28 #

    그렇습니다...
  • 2018/05/14 15:18 # 삭제 답글

    약간의 딴지를 걸자면 히틀러보다 소련이 위협이라는 지도부의 감성이 정책의 원인 중 하나라면 그건 분명히 비판받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가정책을 감정으로 판단한 거잖아요.
    영국에 분명 정보원이 있을텐데 독,소에 대한 자료를 모아서 냉정히 판단할 수 있지않습니까
    그리고 그 유화정책의 문제점은 그게 실패했을때의 문제 아닙니까? 실패로 돌아가고 대응보면 체임벌린은 욕 먹는 게 당연하다 생각하는데요
  • 파리13구 2018/05/14 15:20 #

    당시 소련에 대한 영국의 첩보에 대해 가지고 계신 정보가 있으십니까?
  • 2018/05/14 16:32 # 삭제

    응? 제가 생각하기에 이래야 했다라 그렇게 파고 드시면 할말은 없습니다만..
    의견제시할때 근거를 중시하는 군요. 제가 좀 섣불리 말한 것 같습니다.
    제 의견의 주는 감정적 판단을 했다면 잘못이다고 이건 본문에도 소련을 더 위험하게 여겼다고 쓰셨잖아요.
    그러니 첩보원을 통해 정보를 얻어판단했으면 낮지않았을까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대체로 이때에 대한 글을 보면 독일을 과대평가했다고 나와서 영국의 첩보력에 의구심이 좀 들었거든요.
    그래서 좀 제대로 활용했어야 되지 않나라는 생각으로 빠졌습니다.
    게다가 스탈린과의 외교적 동맹이 결론적으로 실패로 돌아간 것 때문에 제가 너무 섣부르게 말한 것 같네요.
    조심하겠습니다. 생각해보니 너무 뇌피셜이었네요
  • 파리13구 2018/05/14 16:34 #

    나중에 사료적 근거를 발견하시면, 제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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