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이 냉전을 끝낼 수 있을까?"


(한동안 뮌헨협정의 원흉 네빌 체임벌린이 만고의 역적이라는 평가를 받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무책임한 평화주의자 체임벌린 이미지를 수정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체임벌린이 1930년대에 실수를 범했다. 그는 독재자와 합의에 도달할 수 있다는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했다. 그는 아마도 전쟁을 막을 수 있는 희망에 너무 집착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영국 역사가 데이비드 더튼 David Dutton 이 해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이 당시에 영국 총리를 맡았고 하더라도 체임벌린 보다 잘했을 것이라 볼 수 없다. 윈스턴 처칠을 포함해서 말이다."
실제로, 체임벌린은 반공투사 보수주의 정치인이었고, 오랫동안 정치적 업적을 인정받았고, 똑똑하다고 명성을 얻었고, 열심히 일했다. 그를 사로잡은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공포스러운 기억이었고, 그 공포는 30년대 유럽에 여전히 생생했고, 다른 유럽 지도자들의 사고 역시 지배했다.
뿐만아니라, 오늘날과는 달리, 30년대의 나치 체제는 아직 아우슈비츠를 만들지도 않았고, 전쟁의 흉악성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영국과 미국에서는 독일에 대한 동정 여론을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데이비드 더튼 David Dutton은 체임벌린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체임벌린은 바보가 아니었다. 당시 어떤 개인도 국제사회의 기본적 사실을 바꿀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의 대세는 독일과의 전쟁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많은 동시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체임벌린도 제1차 세계대전의 기억의 지배를 당했다. 전쟁 전문가들은 미래 전쟁은 심지어 더욱 최악일 것이라 전망했다. 전쟁의 살육 드라마에는 공중으로부터의 끔찍한 파괴가 추가될 것이다. 스페인 내전을 관찰한 결과, 독일 공군의 첫번째 수주 동안의 공습으로 50만이 희생당할 것으로 보였다. 영국 본토가 독일 폭격기로부터 무방비상태 였다."
뿐만아니라, 1938년에 영국의 전쟁 준비상태도 엉망이었다.
체코의 주데텐란트 위기가 고조될 무렵, 1938년 3월, 영국군 합동 참모본부는 영국은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차지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결론내렸다. 영국의 장군들은 영국이 전쟁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믿었다. 1938년 9월 20일, 제국방어 위원회 서기, 헤이스팅스 이스메이는 관련 보고서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영국 편이라 주장했다. 이스메이에 따르면, 전쟁 발발을 지연시키면, 영국 공군이 전투기를 보강할 시간을 벌게되고, 그 전투기들을 가지고 독일 공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게 될 것이며, 그것만이 히틀러를 패배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이스메이를 포함한 영국 전략가들은 자신의 조국이 전쟁을 장기전으로 질질 끌면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이 바로 영국 군부의 믿음이었고, 체임벌린은 이를 행동에 옮겼을 뿐이었다.
1938년 히틀러에 대한 체임벌린의 유화정책은 전략적 실수로 평가하는 것이 타당하다. 유화는 그의 정적 윈스턴 처칠이 주장한 것처럼 불명예스러운 행동이 아니었다. 1940년 체임벌린은 총리 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정부에서 중요한 직위를 계속 유지했다.
참고-
Ishaan Tharoor, In defense of Neville Chamberlain, hindsight’s most battered punching bag, washingtonpost, July 20, 2015
덧글
스페인 내전 등. 전쟁이 벌어진다면 일어날 최악의 수가 많아서 어떠한 통치자라도 체임벌린과 같은 선택을 하거나, 더 나쁜 선택을 했을거라는 평가을 알게 되었죠.
한국의 보수우파들은 항상 체임벌린의 평화쇼를 비난과 비판을 해댔지만, 똑같은 상황이라면 무슨 선택을 했을까? 다시금 체임벌린이 활동했던 시대적 상황-국력과 국방력-국제정치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문제는 체임벌린이 종이를 든 장면 하나가 너무 임팩트가 컸고. 히틀러가 상상 이상으로 막가파였으니...
또한 영국 보수주의자들은 나치 독일 뿐만아니라 소련 빨갱이들을 혐오했기 때문에,
독일을 강하게 만들어, 소련의 팽창을 유럽 대륙에서 견제한다는 구상도 유화정책에 담겨있다고 봅니다.
당시 역사를 좀더 진지하게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ㅠ
당시 역사를 공부해 보시면, 나름의 해답을 발견할 수 있다고 봅니다.
다만, 체임벌린은 죄에 비해서 너무 과도하게 욕을 먹는다고 봅니다. ㅠㅠ
오히려 당시에 처칠 같은 강경파가 특이한 경우였고...
파시즘 독일 보다는 공산주의 소련이 영국의 주적이다. 독일을 강하게 만들어, 소련의 팽창을 견제하자는 것입니다.
이제 독일 견제를 위해서 소련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 체임벌린을 중심으로한 영국 보수당의 정책이 되었다는 의미입니까?
1936년 3월 7일 히틀러의 라인란트 진주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프랑스와 영국은 어떻게 대응하려 했습니까?
아니면 질문의 의도부터 명확하게 해주시든가요.
단순히 독일 견제 아니면 소련 견제의 흑백으로 설명하기에는 좀 복잡한 문제라 하셨는데,
부연해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영국의 대응으로 다음 서술이 있습니다.
The reaction in Britain was mixed, but they did not generally regard the remilitarization as harmful. Lord Lothian famously said it was no more than the Germans walking into their own backyard. George Bernard Shaw similarly claimed it was no different than if Britain had reoccupied Portsmouth. In his diary entry for 23 March, Harold Nicolson MP noted that "the feeling in the House [of Commons] is terribly pro-German, which means afraid of war".[169] During the Rhineland crisis of 1936, no public meetings or rallies were held anywhere in protest at the remilitarization of the Rhineland, and instead there were several "peace" rallies where it was demanded that Britain not use war to resolve the crisis.[170]
라인란트 위기가 영국 정책에 준 영향은 무엇일까요?
영국과 프랑스의 대응이 달랐다면,
그 차이의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영국은 라인란트 위기에도 불구하고, 친독일적 정책을 버리지 않았고,
그 사상적 배경에는 영국 보수당의 반공주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라인란트 위기 이후 체임벌린의 유화정책이 탄생하는 배경에는
파시즘 독일 보다는 공산주의 소련이 영국의 주적이다. 독일을 강하게 만들어, 소련의 팽창을 견제하자는 사상이 여전히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피그말리온 님의 머리가 아니라, 사료적 증거를 제시해 보라는 겁니다.
논리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 영국이 그랬습니까?
7시 00분의 저의 답글을 보면, 님의 논리에 대한 사료적 반증이 제시되고 있지 않습니까?
자꾸 얘기를 이거 아니면 저거로 몰고가려 하시니까 얘기가 꼬이는데, 몇 년의 시간을 걸려 복잡하게 이루어진 나라간의 일을 그렇게 재단하려 하면 얘기가 성립할 수 없을겁니다. 지금 여기서 사료를 가져와라 뭐해라 이렇게 싸울 시간과 여유도 서로 없을 거 같고요. 나머지는 읽는 분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