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년]베트남,대만 그리고 미국의 신뢰? Le monde

[1900년] 미국에게 필리핀은?


1950년-1954년 동안 한국,베트남 그리고 대만 해협에서 중국과 미국이 충돌했다. 한국에서는 실제로 충돌했고, 나머지 2번의 경우에서는 충돌 직전까지 갔고, 모든 경우에서 미국은 중국에 대한 핵무기 사용을 검토했다. 

1954년 7월, 제네바 협정이 타결되면서, 적어도 당분간 미국과 중국이 베트남 문제로 무력 충돌할 일은 없게된 마당에서, 

모택동의 중국은 1954년 9월 3일 대만의 금문도에 대규모 포격을 개시했고, 역사는 이를 “제1차 타이완 해협 위기”라 부른다. 

제1차 대만해협 위기가 흥미로운 점은 불과 몇달 전의 제네바 회담에서 서양과의 평화공존을 울부짖던 중국이 진먼 섬과 마쭈 섬   Kinmen and Matsu islands 에 대한 장개석의 사수 의지를 실험하기 위한 도발에 나섰다는 점이었다.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무기력함을 스스로 드러낸 바 있는 아이젠하워의 국방정책인, 뉴룩정책 New Look 은 대만 해협에서 다시금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미국은 디엔비엔푸에서 베트민에게 포위된 프랑스군을 군사적으로 돕는데 실패했다. 디엔비엔푸 때문에 뉴룩정책의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된 이상, 아이젠하워와 덜레스는 자신의 국가안보 독트린의 효율성을 입증할 기회를 찾았고, 그곳이 바로 대만 해협이었다. 

베트남에서 그랬던 것처럼, 미국 정부는 다시 한번 그 자체로 정치적이며 심리적인 가치만을 가진 땅덩어리를 놓고, 중국과의 전쟁 위기에 다시 직면하게 되었다. 

베트남과 대만의 경우에서, 백악관의 정책결정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 미국의 신뢰성 credibility 이었다. 미국은 공산주의의 팽창 야욕을 막고, 자유세계를 수호하겠다는 세계에 대한 공약이 공허한 수사가 아님을 행동으로 입증할 필요가 있었다. 아이젠하워가 처칠에게, "우리는 어떤 지점에 도달했는데, 그것은 바로 끊임없는 양보가 적의 호전성만을 고무시키는 지점이다."라고 조언한 것은 바로 이 같은 상황에서 였다. 즉 미국과 영국은 공산주의 팽창을 막는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대만 해협에서의 적의 도발에 맞서면서 약속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다. 

국무장관 덜레스도 대만 해협 위기를 베트남과 제네바 회담의 논리적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참고- 

James Waite, The End of the First Indochina War: A Global History, Routledge, New York, 2012. 205-206.
 



덧글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2014 대표이글루


2016 대표이글루

2015 대표이글루

2013 대표이글루

2011 이글루스 TOP 100

2010 이글루스 TOP100

2010 이글루스 TOP100

2017 대표이글루_history

방문자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