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미국에게 필리핀은?


1954년초, 베트남의 북서쪽의 라오스 국경부근의 디엔비엔푸에서 궁지에 몰린 프랑스는 미군의 도움을 간청했다.
프랑스의 원조 요구에 대해서, 미국은 원칙적으로 동의했지만, 그 내용에 대해서 미국과 프랑스가 이견을 보였다. 프랑스가 미국의 단독 개입인 벌처 작전을 주장했다면, 미국은 동맹국들의 공동 개입, 즉 전쟁의 국제화를 주장했다. 인도차이나 주둔 프랑스군 사령관 나바르는 미국이 주장하는 공동 개입을 통한 전쟁의 국제화를 반대했다. 그에 따르면, 공동개입이 인도차이나에 대한 프랑스의 권리를 침해할 뿐이라는 것이었다. 나바르는 정부에 보낸 보고서에서 다음을 주장했다. “확실한 것은 전쟁의 국제화는 인도차이나에서의 프랑스의 영향력의 종말이라는 것이다. 이 한 번의 일격으로, 프랑스의 백 년의 노력과 8년의 희생이 끝장나게 된다.” 1)
다른 한편, 미국은 개입의 전제조건으로 다음을 제시했다. 덜레스는 프랑스 정부에게 바오다이의 베트남국 the State of Vietnam 에 대한 의미있는 독립을 보장하지 않는한, 미군 개입을 없을 것임을 분명히 통보했다.
이 미국의 조건이 프랑스의 라니엘 정부에 큰 문제를 던졌다. 바오다이와 프랑스 정부의 독립 협상은 기껏해야 흉내만 내는 정도에 불과했다. 베트남국의 전쟁 참여에 대한 미국의 기대가 높았던 반면에, 프랑스는 베트남국의 능력에 대해서 냉소적이었다. 덜레스가 라니엘에게 왜 베트남 국군이 한국군 만큼 전투력을 보이지 못하느냐 묻자, 라니엘 총리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베트남에는 이승만이 없다." 2)
1)“Note sur la situation militaire en Indochine à la veille de la Conférence de Genève,” 21 avril 1954, AN, F60 3038, dossier note sur la situation militaire en Indochine à la veille de la Conférence de Genève. ; James Waite, The End of the First Indochina War: A Global History, Routledge, New York, 2012.p.100.
2) James Waite, The End of the First Indochina War: A Global History, Routledge, New York, 2012.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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