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년]제네바 회담과 소련-중국-베트민의 동상이몽? Le monde

[1900년] 미국에게 필리핀은?


냉전 초기 소련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공산진영이 전세계의 공산화를 위해 혈안이 된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적어도 1954년 제네바 회담에서는 예외였다. 

우선 스탈린 사후, 서양을 상대로 평화공세를 전개중이던 소련은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모스크바는 베이징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무분별한 행동을 자행할 수도 있는 중국 때문에, 소련은 새로운 세계대전에 휘말리게 될까 두려웠다. 다른 한편으로 소련이 평화를 원했던 것은 동남아시아에서의 중국 영향력의 지나친 팽창을 그들이 달가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54년 1월 말의 베를린 회담에서 소련 외상 몰로토프는 제네바 회담 개막을 위한 중요한 양보를 했기 때문에, 프랑스는 소련이 제네바에서 인도차이나 분쟁의 평화로운 해결을 위해 협력할 것이라 기대할 수 있었다.

제네바 회담을 즈음하여 중국이 가장 두려워 한 것은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를 미국이 대체하는 것이었다. 또한 중국은 중일전쟁,중국 내전 그리고 한국전쟁과 같은 일련의 전쟁으로 기진맥진한 상태였고, 경제의 현대화와 체제의 공고화를 위해서 평화가 필요했다. 따라서 중국도 제네바에서 협조적으로 나올 것으로 기대할 수 있었다. 

실제로 제네바 회담에서 디엔비엔푸에서 완승을 거둔 베트남은 베트남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했고, 외교 공세를 통해서 프랑스의 철군 그리고 호치민의 베트남 독립정부의 승인을 받으려 했다. 

이렇게 기고만장한 베트민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타협을 강요한 것이 바로 소련과 중국이었다. 회담에서 특히, 소련과 중국은 협상 결렬시에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의 미국이 군사 개입할 것으로 우려했기 때문에 베트민에 타협을 강요했다. 

특히, 베트남의 강경한 입장을 잠재우고, 타협을 통한 협상 타결을 압박한 것이 바로 모택동과 주은래였다. 중국은 전쟁의 지속을 통한 무력 통일 보다는 북위 17도 선을 기준으로 한 분단을 수용하라고 북측을 압박했다.

당시의 중월관계의 불신을 보여주는 사건이 있었다. 1954년 7월 22일 제네바 회의 참가자들을 위한 만찬이 열렸는데, 만찬 도중 중국 대표였던 주은래 수상은 회의에 참석한 베트남 남쪽의 총수 고 딘 디엠(Ngo Dihn Diem)의 동생에게 북경에 사이공 측의 공사관을 여는 것이 어떠나는 놀란 만한 제안을 한다. 협정이 체결 된 지 24시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중국이 벌써 특유의 양다리 외교를 시작한 것이다. 사이공 측의 거부로 제안이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월맹은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베트남을 영구 분단시키려는 중국의 의도에 대한 논쟁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증거가 나왔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중국은 베트남이 인도차이나의 패권 세력이 되는 것도 견제했다. 1954년 6월 15일 제네바에서주은래는 베트민의 팜반동에게, 베트남을 제외한 나머지 인도차이나 국가들에 대한 야심을 버리라고 강요했다.이러한 주은래의 주장에 대해, 베트남 사료는 중국의 주장에 새로운 동기가 깔려있음을 주장했다. 즉 중국공산당이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자신의 세력권에 편입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나머지 인도차이나가 베트민의 손아귀에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 했다는 것이다. 즉 중국의 입장은 호치민의 정부에게 인도차이나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주는 것 보다는 차라리 라오스와 캄보디아 중립이 더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역사가 챙자이 Qiang Zhai 는 중국의 베트남 정책의 이중성을 강조했다 : 협력과 봉쇄.
베이징은 호지명의 당이 프랑스와 미국이라는 외세에 투쟁하는데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 협력은 중국의 남부 국경에서 서양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낸다는 점에서 중국의 안보 이익에 기여했고, 인도차이나 혁명을 지원한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와 조화를 이루었다. 하지만, 베트남 노동당이 독립과 통일을 이루는데 도움을 주었던 베이징은 베트남이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대한 지배에 나서는 것은 봉쇄했다. 이렇게 협력과 봉쇄 사이에서 중국의 베트남 정책이 모순,갈등 관계를 이루면서, 베트남-중국 관계도 변화해 나갔다.나머지 인도차이나에 대한 베트남과 중국의 갈등은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배경이 되었다.

결국 제네바에서 호치민의 베트민은 2가지 중요한 양보를 했다 : 17도선을 기점으로 하는 휴전선과 1956년에 국제 감시하의 전국적 자유 선거의 실시. 2년 뒤의 선거로, 베트남인 스스로 자신의 정치적 미래를 결정할 것이었다. 제네바 협정은 베트남 중립을 목적으로 했고, 남북 베트남 모두 어떤 세력과도 군사 동맹을 맺지 못하게 만들었다.     


참고-

Kathryn C. Statler, Replacing France: The Origins of American Intervention in Vietnam,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Reprint edition (November 11, 2009),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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