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 사망과 영국-미국-프랑스 동맹의 균열? Le monde

[1900년] 미국에게 필리핀은?

<버뮤다 정상회담 1953년 12월> - 원스턴 처칠,아이젠하워, 라니엘

1953년 3월 5일에 소련의 스탈린이 사망하고, 소련 지도부가 평화 공존을 주장하면서, 냉전의 해빙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 바로 7월의 한국전쟁 휴전이었다.

스탈린 사망 이후 크렘린에서는 흐루쇼프,베리아,말렌코프,몰로토프 사이의 목숨을 건 권력투쟁이 진행 중이었고, 이 혼란을 서양은 냉전의 긴장완화, 즉 데탕트를 위해 이용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소련의 평화공세를 바라보는 서양 동맹 3국의 입장은 달랐다. 아이젠하워의 미국은 이를 소련의 속임수이며, 전술상의 변화에 불과하며, 공산진영의 팽창주의 전략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고 해석했다. 반면, 프랑스와 영국은 이를 다르게 해석했다.

우선, 프랑스는 소련의 평화공세와 한국전쟁의 휴전을 자신의 인도차이나 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기회로 간주했다. 즉, 인도차이나 분쟁의 협상을 통한 해결이 프랑스 정책의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반면에, 아이젠하워와 덜레스의 미국은 인도차이나에서의 군사적 총공세를 주장했고, 군사적 승리 이후에야 비로서 공산진영과의 평화에 나설 수 있을 뿐이라 주장했다. 

영국와 미국의 이견은 53년 12월의 버뮤다 3국 정상회담에서 부각되었다. 이 회담에 영국의 처칠,미국의 아이젠하워,프랑스의 라니엘이 참석했다. 

영국 총리 처칠은 1953년 12월 버뮤다에서 아이젠하워를 만나 새로운 평화 주도안을 요청했다. 처칠은 스탈린의 사망이 냉전을 완화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1953년 5월 11일, 영국 하원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이 해결될 때까지 소련과의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실책입니다.” 하지만 아이젠하워는 회의적이었다. 그는 처칠에게 이런 노골적인 말을 했다. “소련은 거리의 창녀 같은 나라입니다. 그 나라가 새 옷을 입고 있든 기운 낡은 옷을 입고 있는 그 속은 여전히 창녀인 것입니다.” 그는 평화를 바라면서도 속으로는 소련과 협상하는 것에 무척 회의적이었다. 13 처칠은 미국이 단순한 냉전 이데올로기와 ‘대규모 보복’의 도그마에 갇혀서 이런 좋은 기회를 날려 보내는 것에 크게 경악했다. 그렇지만 아이젠하워는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미국과 소련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난 오해 때문에 그의 순간은 결코 오지 않았다.


참고-

제프리 D. 삭스, 존 F. 케네디의 위대한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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