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년]영국,베트민과 소련을 엮으려는 노력? Le monde

[1900년] 미국에게 필리핀은?


<영국 런던에서의 베트남전 반대시위>

1947년, 인도차이나 전쟁에 나선 프랑스가 영국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같은 아시아 지역의 식민지 강대국인 입장에서 싱가폴과 홍콩을 지키기 위해서 영국은 프랑스를 돕고자 했다. 

하지만 전후 부상하는 아시아 민족주의 세력의 압력과 여당인 영국 노동당 내부의 좌파 반제국주의 파벌의 비판에 직면해서, 영국 정부는 프랑스를 돕는 다른 방법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방법이란 바로 미국을 끌어들리는 것이었다. 

1947년은 미국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한 해였고, 미국의 정책은 소련 팽창주의의 저지를 공식적인 국가 정책 목표로 설정했다. 

영국의 인도차이나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유도,설득하기 위해서는 이곳에서도 소련 팽창주의가 위협이 된다는 증거를 제시해야 했다. 즉 베트민은 소련 크렘린 팽창을 위한 끄나풀이란 논리가 성립해야만 했다. 이를 위해서 영국은 증거 수집에 나섰다. 

이렇게 영국 관리들은 하노이와 모스크바를 엮기위한 증거 수립에 나섰지만, 사실상 아무런 증거도 찾지 못했다. 소련의 정책을 검토한 결과, 소련은 동남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만 드러났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발발 직후, 모스크바의 영국 대사관은 인도차이나 문제에 소련 미디어가 관심이 없다는 점을 발견했다. 또한 영국 관리들은 베트민과 프랑스 공산당과의 관계에서도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심지어, 1946년 12월, 파리 영국 대사관의 애슐리-클라크는 프랑스 정부 내부에서 공산당 장관들과 다른 정파의 장관들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에서도, 프랑스 공산당 장관들은 정부의 인도차이나 정책을 지지하는 올바른 행동을 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당시에 모스크바와 프랑스 공산당은 베트남 문제 보다는 프랑스에서 권력을 장악하는 문제에 보다 관심을 가졌고, 따라서 프랑스 공산당의 입지를 약화시킬 수도 있는 베트민에 대한 지지를 삼가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도, 인도차이나에 대한 공산당의 입장은 프랑스의 주류적 입장에서 벗어남이 없었다. 

결국, 영국 당국은 외국공산당이 베트민을 통제하고 있다는 증거를 찾지 못하고, 그런 주장을 의심하게 되었다. 


참고-

Mark Atwood Lawrence, Assuming the Burden: Europe and the American Commitment to War in Vietnam (Berkeley, CA: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5), 169-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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