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년]인도의 네루와 베트남 호치민의 연대... Le monde

[1900년] 미국에게 필리핀은?


<자와할랄 네루와 호치민- 1954년 10월 18일>

1947년 프랑스와 베트민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프랑스는 아시아의 민족주의 세력으로부터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아시아의 민족주의자들은 이 전쟁을 반식민주의 투쟁으로 인식했다. 

태국에서, 반불 감정이 고조되었다. 콜롬보의 실론 부두 노동자들은 프랑스 선박에 대한 유류 보급 작업을 거부했고, 프랑스는 다른 재보급 장소를 물색해야 했다. 말라야와 싱가폴의 노동조합도 유사한 행동에 돌입했고, 인도차이나에 전쟁 물자와 병력을 수송하는 선박에 대한 작업을 거부했다. 인도에서의 상황은 보다 심각했고, 자와할랄 네루가 이끄는 임시정부는 베트민의 투쟁을 아시아에서의 유럽 식민주의에 맞서는 투쟁의 일부라고 선언했다. "프랑스와 같은 강대국이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약소국과의 싸움에서 항공기,대포,전차를 동원하는 장면을 보고, 모든 아시아 국가들의 아시아인이 전율한다."고 네루가 프랑스 외교관에게 말했다. 인도에서 반-프랑스 정서가 고조되면서, 인도의 좌익 대학생들이 47년 1월 21일을 "베트남의 날"로 선포하고, 과격 시위를 전개했다. 이에 당황한 프랑스 정부는 인도 정부가 베트민에 대한 외교적 혹은 군사 원조에 나서지 않을까 고심했다.

파리를 보다 성가시게 만든 것은 인도와 버마 민족주의자들이 베트민을 돕기 위한 군사원조 활동을 모색했다는 점이었다. 인도에서, 임시정부의 전직 장관 사라트 찬드라 보스 Sarat Chandra Bose 가 인도 의용군을 조직해서, 용감한 베트남인들을 돕자고 주장했다. 버마에서, 전직 대령인 보얀나잉 Bo Yan Naing 이 베트민 지원을 위한 인도-버마 의용 연합부대의 창설을 주장했다. 

하지만 의용부대 문제보다 파리 정부를 긴장하게 만든 것은 인도와 버마가 인도차이나로 향하는 프랑스의 선박과 항공기에 대한 통과를 거부하거나 제한하려 한 시도였다. 인도와 버마의 거부는 국제 사회에 선전 효과가 있을 뿐아니라, 인도차이나에 대한 프랑스 본토의 보급전을 진행하는데 장애가 될 수 있었다. 상황의 심각성 때문에 폴 라마디에 Paul Ramadier 총리가 조르주 비도 Georges Bidault 외무장관에게 인도 당국과의 즉시 협상을 지시하게 만들었다. 이를 위해서 프랑스 외교 당국은 인도와 버마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서 영국 정부의 지원을 호소했다. 하지만 영국은 프랑스를 위해 개입하는 것을 꺼렸고, 다만 프랑스,인도,버마 당국자들 간의 협의를 통해서 제한적 영공 통과 허가가 가능하게 도움을 주었을 뿐이다. 

그 결과, 랑군에서, 버마 임시정부는 하루에 두 대의 프랑스 항공기가 자국에 기착하는 것을 허가했다. 하지만 인도 당국은 매주 단 한 대의 프랑스 항공기만 인도 영토에 기착하거나, 영공을 통과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영국 관리들은 프랑스 당국자들에게, 제한을 완화하기 위해서 인도 정부에 압력을 가하지 말 것을 조언했다. 그 경우, 인도 정부는 영공 통과에 대한 완전 금지로 대응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프랑스 해군도 유사한 문제에 직면했다. 봄베이와 다른 인도 항구에서, 인도 부두 노동자들은 프랑스 선박에 대한 작업을 거부했다. 따라서 프랑스 해군 선박들은 싱가폴과 다른 경유지로 우회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곳에서 조차도 냉랭한 대접을 받았다.    
 

참고-

Mark Atwood Lawrence, Assuming the Burden: Europe and the American Commitment to War in Vietnam (Berkeley, CA: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5),163-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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