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미국에게 필리핀은?


<드골과 장개석>
44년 10월 미군이 필리핀에 상륙하면서, 연합군의 승리 가능성이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당국자들의 불안은 오히려 높아졌다.
불안의 근거는, 미국과 중국의 군대가 인도차이나를 독단적으로 해방하고, 인도차이나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 프랑스를 배제시킬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것은 미국 루스벨트의 정책이었다.
그런 가운데, 프랑스는 장개석의 위협은 더 낮은 차원의 것이라 인식했다.
프랑스 당국자들은 인도차이나 영토에 대한 중국의 오랜 야심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통킹으로의 중국의 진출이 문제를 유발할 수도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전쟁동안 장개석이 중국내의 여러 베트남 정치세력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사실이 전후 중국이 베트남 내정에 개입할 수단을 제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이러한 위협을 관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뿐만아니라 중국 국민당 지도자 장개석은 중경 주재 프랑스 대사 페코프에게, 자신의 정부는 인도차이나에 대해 어떠한 영토적 야심도 가지고 있지 않고, 심지어 장은 프랑스의 통치가 회복되는데 도움을 주겠다고까지 약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중국의 군벌이 자신의 야심을 실현을 노릴 가능성에 대해서, 장개석은 이 경우 국민당 정부는 국가 정책에 대한 도전의 차원에서 이 문제에 개입할 것이라 주장했다.
프랑스 당국자들은 또한 전쟁 직후 중국에서 내전의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장개석의 중국이 변방에서의 군사적 모험에 나설 여력이 없을 것이라 기대했다. 심지어 프랑스 외무부의 일부 전문가들은 중국이 전후에 프랑스와의 협력을 위해서 인도차이나에 대한 야심을 깨끗이 포기할 것이라고 전망했는데, 이는 중국 내의 반공 투쟁에서 프랑스의 지원을 얻기 위해서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참고-
Mark Atwood Lawrence, Assuming the Burden: Europe and the American Commitment to War in Vietnam (Berkeley, CA: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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