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애국운동과 호치민, 파리13구? Le monde

[1900년] 미국에게 필리핀은?


1918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의회에 보낸 연두교서에 주장한 민족자결주의가 한국을 비롯한 식민지 민족들에게 희망을 불씨를 지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베트남 민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1919년 겨울, 파리평화회담에서 유럽에서의 전후 평화를 위한 협상을 할 동안, 해외의 베트남 민족주의자들, 그들은 안남의 애국자 모임 the Groupe des Patriotes Annamites 이라 불렸는데, 그들이 파리13구의 작은 아파트에 모였다. [호치민이 1923년말까지 머물던 파리13구의 데 고블랭의 6 빌라 6 Villa des Gobelins 의 그의 집이었는지도 모른다.] 

윌슨의 민족자결 수사에 감명을 받은 그들은 프랑스의 식민 통치로부터 베트남의 점진적인 독립을 주장한 청원서를 작성했다. 청원서는 베르사유의 강대국 지도자들에게 전달할 예정이었다. 최종 문안은 "안남 인민의 요구" ‘‘Revendications du Peuple Annamite," 라는 제목으로, 8개조의 요구 사항을 담았다. 정치범 사면, 프랑스인과 베트남인의 법적 권리의 평등, 언론의 자유, 정치 결사의 권리, 프랑스 의회에서의 베트남인의 영구 대표권 등. (베트남의 독립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청원서의 주요 작성자는 판 추 트린 Phan Chu Trinh으로, 그는 베트남의 반식민주의 지도자들 중 가장 영향력이었다. 그런데 청원서의 공동 서명자들 중에는 당시로서는 알려지지 않은 , 가명이 응우옌 아이꾸옥('조국을 사랑하는 사람', 阮愛國)인 자가 있었다. 

파리 강화회담이 끝나기 전에, 안남의 애국자 모임은 자신의 청원서를 각국 대표단에게 보냈고, 우드로 윌슨에게도 보냈지만, 그들의 청원은 무시당했다.

그로부터 25년 후, 응우옌 아이꾸옥 Nguyen Ai Quoc 은 호치민이란 이름으로 베트남 정치 무대에 다시 등장했고, 다시 한번 베트남 독립을 위한 미국의 지원을 요구했다. 이번에는 공산주의 계열의 베트민 지도자로 요청을 했다. 하지만 이번도 미국은 묵묵부답이었다. 이렇게 호치민은 양차대전 직후에 미국에 베트남 독립을 2번 청원했지만 2번 모두 무시당했다. 

지난 25년 동안, 베트남 반식민주의 운동의 본질이 심각한 변화를 겪었다. 파리의 안남의 애국자 모임의 온건한 청원서가 파리 강화회담에서 거절 당하면서 학자와 중산층이 주도하는 민족운동이 쇠락했다.  판 추 트린 Phan Chu Trinh이 주도했던 점진적 사회 개혁을 통한 민족운동이 쇠퇴하면서, 이를 대신한 것은 젋은세대의 급진적이고 과격한 민족운동이었다. 1930년대에 맑스-레닌주의 국제주의가 베트남의 반식민주의의 주요 동력이 되었다.

호치민의 경우, 우드로 윌슨으로부터 당한 상처를 치유하면서, 그를 대신 사로잡은 것이 바로 소련의 레닌이었다. 

어느 날, 호치민은 레닌의 글을 읽고, 눈앞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바로 이거야!"  1920년 호치민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의 <<민족과 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를 읽었다.



참고-

Mark Philip Bradley, Imagining Vietnam and America: The Making of Postcolonial Vietnam, 1919–1950 (Chapel Hill: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2000),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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