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카오방 전투- 프랑스 몰락의 전주곡? Le mo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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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방 전투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중, 프랑스 군대와 그의 꼭두각시 베트남국 군대와 베트민 군대가 교전한 전투였고, 베트민의 압승으로 끝났다. 

전투는 1950년 9월 30일부터 10월 18일 동안 전개되었고, 프랑스군 사령관 마르셸 카르팡티에 Marcel Carpentier 장군이 지휘하는 6천의 프랑스군과 2천의 베트남국 정규군이 보구엔지압이 지휘하는 3만의 베트민 정규군과 싸웠다.

전투 결과로 프랑스군 4800명이 죽거나 부상당했고, 2000 여명이 실종 혹은 포로가 되었다. 

카오방 전투는 4번 식민지 도로  전투 Battle of Route Coloniale 4 라 불리기도 한다. 4번 식민지 도로는 카오방의 프랑스 군 기지를 위한 중요한 보급로였다. 4번 도로는 1947-1949년 동안 베트민의 매복공격의 주요 목표물이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54년의 디엔비엔푸 전투가 기억되며, 50년 카오방 전투는 상대적으로 잊혀진 전투였지만, 인도차이나 프랑스 제국의 몰락의 전주곡이었다. 특히 베트민 군대가 프랑스군의 정예인 외인부대 수개 대대를 참패로 몰아넣었다는 점이 충격적이었다. 참패한 부대는 이후 전투 기능을 상실했다.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장개석에 대해 모택동 중국공산당이 1949년에 최종 승리를 거두면서, 호치민에 대한 중국의 지원이 강화되었다. 베트민의 보구엔지압이 1950년 초에 프랑스에 공세를 가한 것은 이런 상황에서 였다. 

50년 2월부터 4월까지 베트민은 중국 국경 지역의 통킹 북서부를 대부분 장악, 그곳을 자신의 거점으로 만들었다. 4번 식민지 도로만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을 장악한 베트민 군대가 도로 장악을 위해 벌인 전투가 바로 50년 10월의 카오방 전투였다.

카오방 전투로 인해서, 프랑스군은 10월 17일 지역의 거점인 랑송을 포기해야 했다. 패배에 따른 사기 저하로 하노이 조차도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전투의 결과로, 카르팡티에 사령관이 50년에 말에 해임되고, 사태 수습을 위해서 장 드 라트트 드 타시니 Jean de Lattre de Tassigny 가 신임 사령관으로 부임해서, 프랑스의 사기를 높이려 노력했다.




덧글

  • 터프한 얼음대마왕 2017/12/18 19:35 # 답글

    중공과 모택동이 전폭적인 지원을 했어도 베트남 군이 왜 이겼을까? 세계대전의 후유증과 식민지 세력의 취약함을 드러냈어도, 왜 졌을까? 연구가 필요하네요;
  • 파리13구 2017/12/19 03:59 #

    베트민의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한 것은

    중국 내전에서 모택동 공산당이 승리한 때와 일치합니다.

    1949년 이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상황이 급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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