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스벨트와 프랑스 그리고 베트남... Le monde

30년대 프랑스 유학 베트남인의 좌절?

<사진 -지로, 루스벨트, 드골, 처칠
1943년 카사블랑카 회담 >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유럽인들을 불신했고, 특히 프랑스인들을 불신했다. 전쟁에서 프랑스가 독일에게 속수무책으로 항복하고, 인도차이나에서 일본에게 그런 것을 경멸했던 미국 대통령은 또한 샤를 드골을 경멸했다. 드골이 자유 프랑스 지도자로, 항복에도 불구하고 독일에 계속 저항하는 프랑스를 대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드골에 대한 루스벨트의 경멸은 전후 인도차이나에 대한 프랑스 통치 부활에도 그가 반대하게 만들었다. 

1942년, 루스벨트는 태평양전쟁 위원회 회의에서 그는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 지배가 부활하는 것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인도차이나는 프랑스 체제의 부활을 원하지 않는다... 프랑스인들은 1832년 이래 인도차이나에 머물러왔지만, 원주민의 삶은 거의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종전 이후, 프랑스의 아시아 영토를 국제연합을 넘기자고 제안했고, 국제연합이 옛 식민지에 대한 신탁통치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스벨트의 아들 엘리어트의 증언에 따르면, 카사블랑카에서 루스벨트는 심지어 일본의 식민통치가 더 나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테헤란 회담에서, 스탈린과 루스벨트가 양국의 전후 인도차이나 정책의 공통점을 확인했다. 스탈린이 미국 대통령에게, “낡은 프랑스의 식민 통치”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이에 기뻐한 대통령이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를 지배한지 100여년이 지났음에도, 주민들의 생활 상태는 오히려 전보다 악화되었다.”라고 말했다. 루스벨트는 중국이 인도차이나에 대한 욕심이 거의 없기 때문에, 20년 혹은 30년 신탁통치를 실시해야 하고, 그 이후 인도차이나가 독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4년, 루스벨트는 인도차이나에서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서 프랑스 군대를 이용하는 것을 거듭 반대했고, 중국이 인도차이나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루스벨트가 1943년 11월, 카이로에서 장개석에게 이 문제를 제기하자, 장개석은 주저하면서, 인도차이나 민족은 다루기 힘들다고 난색을 표시했다. 

참고-

Robert D. Schulzinger, A Time for War: The United States and Vietnam, 1941–
1975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7),26
Justus D. Doenecke,Mark A. Stoler, Debating Franklin D. Roosevelt's Foreign Policies, 1933-1945, p.56. 



덧글

  • 전위대 2017/11/30 17:06 # 답글

    라나 미터의 지적에 따르면 장개석 역시 장기적으로는 중국이 국제적인 역할을 하기를 원했다고 하지만 중일전쟁의 파멸적인 피해를 이미 알고 있던 장개석 입장에서는, 인도차이나 진출이 솔직히 뜨악하기까지 했을 겁니다. 지방에서의 행정적 권위가 거의 무너진 시점에서 1937년의 수준으로 나라를 되돌리는 것조차도 가공할 노력이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인도차이나 진출은 언감생심의 수준이었죠. 그나마 받아들인게 시코쿠의 분할통치 정도였는데 결국 국민정부는 무너졌죠.
  • 파리13구 2017/11/30 17:14 #

    일본 패망 이후 무장해제를 위해 베트남에 진출하지만,

    프랑스의 압력도 있어서, 곧 철수합니다.

    호치민은 장개석의 중국이 일단 들어오고나서 철수를 거절할지에 대해 우려하던 상황이었습니다.

    일단 호치민은 프랑스를 앞장세워, 일단 중국부터 철수시키자는 입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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