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의 전과 부풀리기... Le monde

30년대 프랑스 유학 베트남인의 좌절?

<사진- 민족해방전선 전사자- 1962년>

주지하는 것처럼 베트남 전쟁은 전선이 없었고, 점령해야할 영토도 없었다. 적을 소모시키는 것이 전쟁의 주요 목표였고, 적 전사자 수가 전황 개선의 지표였다. 대부분의 관련 당국자들이 이 지표가 믿을만 것이 아님을 인정했다. 

적 게릴라와 민간인이 뒤섞인 전장에서, 미군이 베트콩과 비전투원을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전투의 한가운데에서 미군 통계원은 정확한 파악을 위해 노력을 거의 기울이지 않았다. 필리프 카푸토에 따르면, "만약 죽은 사람이 있는데 베트남인이면, 그것이 바로 베트콩이었다."라고 증언했다.

미군의 지휘계통을 따라, 우호적인 전황 수치를 제시하는 것을 선호했고, 모든 보고 단계에서 부풀리기가 관행이 되었기 때문에, 이 보고가 워싱턴에 도달할 즈음이 되면 전황의 수치는 현실과 거리가 먼 것이 되었다. 적 전사자 수 통계는 과장되었고, 30% 정도가 부풀리기 되었다고 추정되었다. 

물론, 미군이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공식 통계는 1967년 말 적의 전사자 수를 22만으로 추정했다. 이 수치를 기초로, 미국은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고 주장했다.


참고-

George C. Herring, America’s Longest War: The United States and Vietnam, 19501975, 2th ed. (New York: ALFRED.A.KNOPF,1986), 153-154. 

1965년말부터 1967년말까지 베트남의 전쟁은 점점 미국화되었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는 정해진 전선이 없었다. 영구적으로 점령할 영토도 없었다. 

미군들은 아침에 헬기를 타고 출동, 오전 오후에 베트콩 혹은 북베트남 군과 교전하고, 저녁에는 기지로 귀환하는 식의 전쟁을 했다. 미군이 싸우고 돌아간 자리에는 얼마후 적이 다시 출몰하곤 했다.

베트남 주재 미군사령관 웨스트모어랜드의 전쟁에서 전황 개선의 지표는 적 전사자 수였다. “body count” of soldiers killed

하지만, 적 전사자 수 자료가 정확한 적 전사자 수를 반영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전투에서 적 전사자 수를 많이 배출한 장교들이 포상되었다. 

때로 장교들은 다음 날 전투에서의 적 전사자 수를 알고 있었다. 냉소적 기자들은 "미국 병사들은 조명등을 들고 밤새도록 적 전사자 수를 세었다." 적 저격병의 위협 속에서 말이다. 

적의 시체의 수가 중요했기 때문에, 미군 병사들은 적인지 확인하기 전에 먼저 쏘고 보는 기질을 가지게 되었다. 

한 해병은 " 밤에 나다니는 베트남인이 '적' 이었다."라고 회고했다. 또 다른 병사는 "죽은 베트남인은 베트콩이었다."고 증언했다.

Robert D. Schulzinger, A Time for War: The United States and Vietnam, 1941– 1975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7),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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