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대 프랑스 유학 베트남인의 좌절?


1930년대 베트남의 부유한 집안의 엘리트들은 식민지 모국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 공부했다. 유학 중에 그들은 파리의 라탱 가에서의 자유와 우애를 경험했다.

하지만 유학을 마치고 베트남으로 돌아갈때, 그들은 식민지 경찰에게 신문과 책을 압수당했다. 식민 경찰은 그들을 잠재적 위험인물로 간주했다.

그들은 자신이 받은 교육에 걸맞는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고, 프랑스인의 임금은 꿈꿀수 조차 없었다. 

더 나쁜 것은, 모든 베트남인을 동등하게 대우하던 프랑스인 하급 관리들은 하인이나 하급자에게나 쓰는 반말 표현인 "너 tu"라는 호칭으로 그들을 불렀다. 

한 유학파 베트남인은 민족주의 선동죄로 구속당한 후, 프랑스 재판정에서, 프랑스의 불의가 자신을 혁명가로 만들었다고 진술했다.



Stanley Karnow, Vietnam: A History,Penguin Books; 2nd edition (1997) ,115
 


by 파리13구 | 2017/10/01 05:20 | Le monde | 트랙백(36)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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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대 프랑스 유학 베트남인의 좌절? 1965년에 시작된 린든 존슨의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란 군사적인 것인 동시에 정치적인 것이었다. 존슨의 미국은 베트콩을 군사적으로 압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미국과 사이공 체제는 정치적으로는 열세였다. 남베트남 장군 팜 쑤안 치우 Pham Xuan Chieu 는 "우리는 정치적으로 매우 약하며, 민족해방전선이 가진 주민에 대한 강력한 정치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미국과 남베트남이 군사력은 압도적이었......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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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베트남전] 수색-섬멸 작전 -1967년 8월
30년대 프랑스 유학 베트남인의 좌절? 주월 미군 사령관인 웨스트모어랜드가 추진했던 수색-섬멸 작전의 한계는 명확했다. 압도적인 화력과 기동력의 미군이 베트콩 밀집 지역을 쓸어버리지만, 소나기 같은 공격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미군이 기지로 돌아가면, 베트콩이 다시 돌아와서, 지역을 다시 통제한다는 것이었다. 미군 작전은 베트콩의 전쟁 능력을 완전히 파괴할 수 없었다. 참고- Mark Lawrence, The Vietnam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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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대 프랑스 유학 베트남인의 좌절?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하노이가 미국과 상대하기 위해서는 공산주의 형제국가인 소련과 중국의 지원이 필수적이었다.하지만, 당시는 소련과 중국의 갈등이 최고조에 도달하였고, 특히 69년이 되면 양국이 무력대결까지 하게 될것이었다. 중소 갈등이라는 상황에서, 하노이는 엄정한 중립과 균형 외교를 통해서, 양국 모두로부터 최대의 지원을 받으려 노력했다. 소련이 미국과의 평화공존 정책을 추진할 동안......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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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대 프랑스 유학 베트남인의 좌절? 70년 5월 닉슨의 미국이 캄보디아를 침공하면서 미국에서 반전시위가 격화되었고,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미국의 내분이 심각한 수준이 되었다.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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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1971년] 베트남 주둔 미군의 상태...
30년대 프랑스 유학 베트남인의 좌절? <사진- 1971년 라오스 국경 부근에 주둔 중이던 미군 포병 병사들... 평화를 주장하는 반전 운동 깃발을 게양하고 있고, 버드와이저 맥주로 전쟁의 시름을 달래고 있었다. 반전을 주장하는 군대라니...ㅠ> 미군 퇴역 장교 출신의 로버트 하인은 71년의 주월 미군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모든 지표 상으로 판단할 때, 베트남에 잔류하고 있는 우리 군대는 붕괴 직전의 상태......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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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대 프랑스 유학 베트남인의 좌절? <사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의 프랑스군 포로>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민에게 완패한 프랑스는 결국 베트남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미국은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잔류를 냉전의 시각, 즉 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하는 몸부림으로 해석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1950-1954년, 미국은 프랑스에게 26억 달러 상당의 군사 원조를 제공했지만, 프랑......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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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김종필, 고딘디엠과 호치민에 대해서...
30년대 프랑스 유학 베트남인의 좌절? 미국은 고딘디엠과 호치민, 두 민족주의자들이 몰래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의구심을 가진 것이다. 미국이 고딘디엠을 제거한 건 실수였다. 그 뒤 월남은 쿠데타가 빈발했고 새로 들어선 정부들은 자기 나라의 안보를 미국에 의존하려고만 했다. 무능과 분열, 부패로 정치 불안정이 커지면서 국민의 의지를 묶어내지 못했다. 반면 호치민은 공산주의자이지만 참 대단한 사람이다. 강대국 미국과 끈질기게 싸워 통일까지 이......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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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월트 로스토와 베트남: 미국의 라스푸틴?
30년대 프랑스 유학 베트남인의 좌절? 월트 로스토, 1961년 여름과 1942년의 공통점은? 한국에서 월트 로스토 Walt Whitman Rostow 는 경제발전단계설을 주장한 미국 경제학자로 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베트남전의 역사에서 로스토는 특히 베트남전쟁 비판가들에게 미국의 "라스푸틴"이라는 오명을 가지고 있다. 로스토는 케네디의 국가안보 부보좌관으로 일했고, 존슨의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일하면서, 미국의 베트남 군사개입을 주도......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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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케네디 암살과 미국의 베트남 철수 신화"
30년대 프랑스 유학 베트남인의 좌절? 미국의 영화감독 올리버 스톤 같은 케네디 추종자들은 암살당한 케네디가 베트남으로부터의 미군 철수를 계획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만약 케네디가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미국에게 베트남이라는 비극은 없었을 것이라 결론내린다. 하지만, 역사가 조지 해링은 관련 사료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지적했다. 암살 당일에 하기로 예정되었던 연설에서 케네디는 제3세계 국가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고통스럽고,위......more

Tracked from 파리13구님의 이글루 at 2017/11/21 02:41

제목 : "샤를 드골의 중재와 호치민..."
30년대 프랑스 유학 베트남인의 좌절? 유튜브를 통해서, 1964년 6월에 한 프랑스 언론이 북베트남이 호치민과 가진 인터뷰 영상을 보았다. 프랑스 기자가, "당신은 어떤 시점이 되면 드골 장군이 이 분쟁을 중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라 질문했다. 호치민- "중재라고요? 당신이 중재(심판)라는 단어가 어떤 뜻을 가지는지 모르는 소립니다. 우리는 두 개의 축구팀이 아닙니다." (하하하) - 64년 6월이면, 통킹......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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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1965년 5월의 베트남전의 전황
30년대 프랑스 유학 베트남인의 좌절? <사진- 65년 3월에 베트남 다낭에 상륙한 미국 해병대> 65년 3월 8일, 최초의 미군 전투병인 3500명의 해병대가 다낭에 상륙했다. 5월까지 월남 주둔 미군 전투병은 4만 7천 명으로 증가했다. 미군 전투병의 개입으로 미국의 베트남 전쟁이 개막되었음에도, 전황은 미군과 남베트남군에게 절망적이었다. 남베트남 군은 붕괴 직전이었다. 징병자의 훈련소 탈영 비율이 50%를 윗돌았다. 미국......more

Tracked from 파리13구님의 이글루 at 2017/11/21 16:25

제목 : 베트남 전쟁과 폭격 효과에 대한 환상?
30년대 프랑스 유학 베트남인의 좌절? 전쟁에서 미국은 공군력에 크게 의존했다. 당시의 군사 교리는 폭격으로 적의 전쟁능력을 파괴할 수 있으며, 따라서 적을 협상장으로 나오게 만든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제2차세계대전에서의 공군력의 폭넓은 사용과 한국전쟁에서의 제한적 사용 효과과는 이 가설의 유효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중요한 폭격 목표물이 거의 없는 베트남 같은 나라에서 폭격의 효과에 대한 의구심이 더욱 컸다.&nb......more

Tracked from 파리13구님의 이글루 at 2017/11/21 17:25

제목 : "미국의 폭격과 북베트남-소련 관계?"
30년대 프랑스 유학 베트남인의 좌절?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은 북베트남에 대한 주요 공격 수단으로 폭격을 선택했다. 폭격을 통해 미국은 하노이의 전쟁의지를 꺾고, 협상장으로 나오게 만들려고 했다. 의도와는 다르게, 미국의 폭격은 다른 결과를 초래했다고 한다. 즉 미국의 폭격이 하노이-모스크바 관계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베트남 공산화 이후, 통일 베트남이 친소 국가가 되어, 중국에 대립하게된 외교의 맹아를 바로 여기서 찾을 수도 있다......more

Tracked from 파리13구님의 이글루 at 2017/11/22 12:45

제목 : 베트남 전쟁의 전과 부풀리기...
30년대 프랑스 유학 베트남인의 좌절? <사진- 민족해방전선 전사자- 1962년> 주지하는 것처럼 베트남 전쟁은 전선이 없었고, 점령해야할 영토도 없었다. 적을 소모시키는 것이 전쟁의 주요 목표였고, 적 전사자 수가 전황 개선의 지표였다. 대부분의 관련 당국자들이 이 지표가 믿을만 것이 아님을 인정했다. 적 게릴라와 민간인이 뒤섞인 전장에서, 미군이 베트콩과 비전투원을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전투의 한가운데에서 미......more

Tracked from 파리13구님의 이글루 at 2017/11/23 15:53

제목 : 1974년, 남베트남군의 탈영자 수는?
30년대 프랑스 유학 베트남인의 좌절? 74년 가을부터 전세가 북베트남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워터게이트의 여파로 미국의 월남 지원이 삭감된 가운데, 1974년, 남베트남군의 탈영병 수는 24만 명에 달했다. 출처- George C. Herring, America’s Longest War: The United States and Vietnam, 1950–1975, 2th ed. (New York: ALFRED.A.KNO......more

Tracked from 파리13구님의 이글루 at 2017/11/27 12:12

제목 : 닉슨-키신저의 베트남 전쟁과 핵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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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파리13구님의 이글루 at 2017/11/28 01:45

제목 : "모택동은 북베트남의 팜반동을 어떻게 달랬을까?"
30년대 프랑스 유학 베트남인의 좌절? <사진- 팜반동과 호치민> 미중화해와 북베트남. 1971년 키신저의 북경방문과 뒤이은 미중화해 소식은 하노이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1960년대 내내, 미국 제국주의와의 투쟁을 강조하면서, 하노이에게 반미 군사 투쟁을 주장하고, 특히 미국과의 평화협상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주장해온 중국이 이제 미국과의 화해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었다. 무엇보다 중국은 북베트남에 대한 주요 ......more

Tracked from 파리13구님의 이글루 at 2017/11/30 16:08

제목 : 루스벨트와 프랑스 그리고 베트남...
30년대 프랑스 유학 베트남인의 좌절? <사진 -지로, 루스벨트, 드골, 처칠1943년 카사블랑카 회담 >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유럽인들을 불신했고, 특히 프랑스인들을 불신했다. 전쟁에서 프랑스가 독일에게 속수무책으로 항복하고, 인도차이나에서 일본에게 그런 것을 경멸했던 미국 대통령은 또한 샤를 드골을 경멸했다. 드골이 자유 프랑스 지도자로, 항복에도 불구하고 독일에 계속 저항하는 프랑스를 대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more

Tracked from 파리13구님의 이글루 at 2017/11/30 16:46

제목 : 루스벨트와 스탈린 그리고 베트남...
30년대 프랑스 유학 베트남인의 좌절? [루스벨트와 스탈린] 스탈린과 루스벨트는 전후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 식민통치가 부활하는 것에 대해 원칙적으로 반대했다. 45년 2월의 얄타회담에서 루스벨트는 인도차이나 문제를 처칠과 논의하는 것을 회피했다. 처칠은 대영제국이라는 명분을 위해서, 전후 인도차이나에서의 프랑스 통치 부활을 희망했기 때문이었다. 대신에 루스벨트는 스탈린과 이를 논의했다. 그는 신탁통치를 제안했고,......more

Tracked from 파리13구님의 이글루 at 2017/12/01 11:17

제목 : [베트남전]전쟁의 베트남화의 기원?
30년대 프랑스 유학 베트남인의 좌절? <베트남화> 미국의 베트남전의 역사에서, 베트남화란 리처드 닉슨의 전쟁 정책으로, 남베트남 군대를 전쟁의 주체로 만들기 위한 정책이었다. 닉슨의 베트남화 정책은 전임인 린든 존슨의 전쟁정책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되었다. 1965년 5월 존슨이 미국 지상군 파병을 결정하면서, 베트남전쟁은 이제 미국의 전쟁이 되었다. 전쟁의 미국화였다. 이런 식으로 전쟁은 남베트남군이 아닌 미군이 전쟁이 되어갔......more

Tracked from 파리13구님의 이글루 at 2017/12/01 13:33

제목 : [베트남전]베트민의 3단계 전쟁 전략.
30년대 프랑스 유학 베트남인의 좌절?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쯔엉찐- 북베트남 공산당 이론가><게릴라전> <1947년> [베트민의 3단계 혁명전쟁 전략] 1947년, 베트민과 프랑스의 충돌이었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맞아, 베트남 공산당 수석 이론가인 쯔엉찐 Truong Chinh 이 <<투쟁에서 승리할 것이다>>를 발간했다. 이는 혁명 전쟁에 대한 개론서였다.......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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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중국이 베트남에서 프랑스의 참패를 원치 않은 이유?
30년대 프랑스 유학 베트남인의 좌절? 디엔비엔푸 전투를 앞둔, 1953년 말, 중국 공산당, 인도차이나에서의 프랑스 염전 厭戰 분위기에 대해 우려했다. 만약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를 포기한다면, 대신에 미국이 들어올 것이며, 중국에게 프랑스 보다는 미국이 보다 공포의 상대였다. 53년 말, 중국이 베트민에게, 프랑스의 평화 제안에 응하라고 조언했고, 그렇지 않으면, 중국의 원조의 일부를 잃을 위험을 감수하게 될 것이라 경고했다.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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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제네바 회담과 베트민에 대한 중국,소련의 배신?
30년대 프랑스 유학 베트남인의 좌절?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에 승리한 베트민은 베트남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 제네바에서의 정치 협상을 통해서, 프랑스군의 철군 그리고 호치민이 이끄는 독립 정부의 수립을 제네바 회의에서 관철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제네바 회담에서, 영국의 앤서니 이든, 프랑스의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 소련의 몰로토프, 중국의 주은래가 베트민에게 압력을 행사, 베트민이 전쟁에서 얻은 것 보다 덜한 타협안을 받아......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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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1943년]루스벨트, 전후 인도차이나 처리 방침?
30년대 프랑스 유학 베트남인의 좌절? 전쟁이 한창인 가운데,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전후의 인도차이나 처리 방침을 밝혔다. 전후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 식민주의가 부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당시, 루스벨트는 전후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위해 "강한 중국"을 주장하면서, 영국령 홍콩의 중국 반환도 주장했다.전쟁 중에 루스벨트는 아시아에서의 프랑스,영국의 식민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었다.이러한 미국의 유럽 제국주의 반대 정책에 대한 대......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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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1963년]남베트남 정규군이 게릴라에게 참패한 전..
30년대 프랑스 유학 베트남인의 좌절? 63년 1월 2일 압박 전투는 케네디 정부에게 과연 디엠 체제로 남베트남을 공산주의 위협으로 지킬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키게 만들었다. 베트남에서 무엇인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으며, 미국이 이를 조속히 시정하지 않으면, 남베트남이 위험해진다는 인식이 강화되었다. 1월 2일압박 Ap Bac 전투 압박은 사이공에서 남서쪽으로 35마일 떨어진 곳의 촌락이었다. 압박 전투에서 압도적인......more

Tracked from 파리13구님의 이글루 at 2017/12/05 12:45

제목 : [63년]틱꽝득의 분신과 마담 누의 망언...
30년대 프랑스 유학 베트남인의 좌절? 63년 6월 11일 남베트남의 승려 틱꽝득이 디엠 정권의 불교 탄압에 항의하면서 분신자살했다. - 케네디는 롯지 대사 지명자에게, “역사상 어떤 뉴스 사진도 이것만큼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감정의 동요를 일으킨 것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Robert D. Schulzinger, A Time for War: The United States and Vietnam,......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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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린든 존슨, 공습의 한계에 대해서
30년대 프랑스 유학 베트남인의 좌절? 1965년 1월, 월남 주재 대사 테일러가 베트남 상황의 악화를 이유로, 북베트남에 대한 공습을 거듭 주장했다. 이에 대해서 린든 존슨은 요구를 거절하면서, "이번 게릴라 전쟁을 공중에서 승리할 수는 없다."고 일갈했다. Robert D. Schulzinger, A Time for War: The United States and Vietnam, 1941–1975 (New York: Oxford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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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조지 캐넌과 베트남 전쟁"
30년대 프랑스 유학 베트남인의 좌절?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이 본격화되었던 1966년 초의 상원 청문회에 미국 냉전의 봉쇄정책의 아버지 조지 캐넌이 출석하여, 베트남 전쟁에 대한 그의 입장을 밝혔다. 미국의 베트남 무력 개입을 지지한 사람들은 이것이 동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봉쇄정책의 일환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봉쇄정책의 아버지의 베트남전쟁 입장은 무엇이었을까? 우선 캐넌은 베트남이 정상적인 조건......more

Tracked from 파리13구님의 이글루 at 2017/12/07 11:13

제목 : [테트 공세]웨스트모어랜드의 허무한 약속?
30년대 프랑스 유학 베트남인의 좌절? <사진- 테트 공세 직후에 베트콩에게 공격받은 미국대사관- 공세 직후에 미군 병사가 대사관 담벽에 난 구멍을 응시하고 있다. 1968년 1월> 1968년 1월의 테트 공세 공방전은 미군과 그의 동맹 월남군이 군사적으로 승리했지만, 심리적으로 참패한 사건이었다. 테트 공세 이후, 민족해방전선의 무력은 사실상 소멸되었다. [빅터 데이비스 핸슨, 살육과 문명, 푸른숲,2002.p......more

Tracked from 파리13구님의 이글루 at 2017/12/08 11:46

제목 : [닉슨]전쟁의 베트남화와 미군의 사기
30년대 프랑스 유학 베트남인의 좌절? 닉슨 정부의 베트남 전쟁 정책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전쟁의 베트남화였다. 전쟁을 미국화한 린든 존슨과 다르게, 닉슨은 주요 전투의 부담을 남베트남 군대에게 부여하고, 국내의 반전 여론을 달레기 위해서, 주월 미군의 점진적,일방적 철수를 단행했다. 일단 미군 철수가 시작되자, 전장의 많은 미군들이 이제 베트남 전쟁을 무의한 것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아무도 이 전쟁의 마지막 전사자 혹은 부상자가 되......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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