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소련,"우리가 냉전에서 이긴다!" Le monde

키신저의 경고...



주보크에 따르면, 미소 데탕트는 1970-1974년 동안 발전하다가, 1975년 이후 쇠퇴하고, 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종말을 고했다.  75년, 미소 데탕트의 두 주역 중 한 명인 리처드 닉슨은 워터게이트로 인해 이미 야인 신분이었고, 다른 한 명인 브레즈네프는 와병으로 약물에 의존하는 신세가 되어, 소련 외교정책을 주도할 수 없었다.

애초에, 소련에게 데탕트 혹은 평화공존은 세계적 ‘힘의 상관관계’ correlation of forces 가 소련 사회주의에 유리한 방향으로 재편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미국이 강대국 소련의 힘을 인정하여, 냉전 국제질서의 조정에 동의한 결과가 데탕트였다는 것이다.

1975년 시점에서 크렘린은 데탕트가 소련에게 1945년 이후 가장 유리한 국제환경을 조성했다는 확신을 가지게 만들었다. 

서유럽이 데탕트를 받아들였고, 그 성공을 위해 경제적으로,정치적으로 투자했다. 

비록 중동에서,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가 미국 편에 가담하면서 타격을 받긴 했지만, 1974년 4월 포르투갈의 좌익 카네이션 혁명과 남 아프리카에서의 소련 영향력 확대로 인해 보상을 받았다. 

75년 4월의 남베트남 공산화로 미국은 동남아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중국은 여전히 적대적이었지만, 소련 혐오자 모택동이 1976년 사망하면서, 중소 전쟁의 위험은 줄었다.

75년 이후 데탕트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크렘린은 소련이 유럽과의 데탕트를 발전시키고, 미국과 협조할 동안, 동시에 제3세계에서의 소련 영향력 확대에 나서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서양과는 평화공존을 하지만, 제3세계에서는 팽창주의적 영향력 확대에 나서는 것이 가능하다는 주장은 모순처럼 보이지만, 소련 관료주의 내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소련 외교정책의 관료주의적 구획화 때문에, 지역 간의 정책 기조 차이가 문제로 인식되지 않았다. 가령, 소련 외무장관 그로미코는 강대국 정책에만 관심이 있었다. 따라서 아프리카와 쿠바를 포함한 남미 문제는 공산당 국제부와 KGB 해외부 전문가들에게 관리를 일임시켰던 것이다. 외교부와 공산당 국제부,KGB가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이 가능한 정책 분권화 상태였고, 이는 대전략의 부재라는 문제를 초래했다.  (반대로 닉슨의 미국 외교정책에서 대전략이 가능했던 것은 헨리 키신저가 이끄는 국가안전보장회의 덕분이었다.)


참고-

Vladislav Zubok, “Soviet foreign policy from détente to Gorbachev, 1975–1985”, in Melvyn P. Leffler and Odd Arne Westad, eds. The Cambridge History of the Cold war. vol. 3, Ending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91-92.




덧글

  • 하니와 2017/08/29 20:28 # 삭제 답글

    1948년 포스터 인가요 ? 중국은 아직 공산화 전이고 인도는 독립? 유럽은 ???
  • 파리13구 2017/08/29 20:39 #

    단순 참고만 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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