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과 흐루쇼프 그리고 식민지 민족해방" Le monde

키신저의 경고...


<흐루쇼프와 스탈린 -1940년대>

냉전 초기 미소 경쟁의 핵심 무대는 유럽이었다. 냉전의 금싸라기 땅의 패권을 두고 두 강대국은 경쟁했고, 다른 지역에 대한 관심은 부차적이었다. 따라서 스탈린은 제3세계 민족해방 문제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덜했다. 하지만 1949년 유럽에서의 미소 경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이제 양 강대국은 다른 지역에 눈 길을 돌렸다. 이렇게 냉전이 유럽 밖으로 확대된 것이다.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은 냉전의 아시아로의 확대를 알리는 사건이었다. 

스탈린 사후 집권한 흐루쇼프가 민족해방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였다. 그리고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흐루쇼프의 관심이 미국의 근심이 되었다. 

냉전이 제3세계로 확대된 이상, 미국 봉쇄정책의 지리적 범위도 전세계로 확대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미국은 핵심적 이익과 부차적 이익을 구분해서, 유럽,일본 등의 핵심 지역의 현상유지에 전념해야 하는가? 

다음은 개디스의 지적이다.

<스탈린>

냉전 초기에는 식민지 해방(탈식민화)이 주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소련은 반-제국주의로 남았지만一어찌 아닐 수 있으랴?一종전 직후 몇 년간 스탈린에게 “제3세계”라 불리는 지역에서〔공산〕혁명을 추진하는 일의 중요도는 뒤로 밀렸다. 이는 스탈린이 전쟁 복구와 함께 유럽에서 가능한 한 폭넓게 세력을 확대하려 했기 때문이다. 미국으로서도 그 기간에는 유럽의 식민주의를 변호하려 들지 않았다. 미국의 역사는 제국에 대한 반란에서 시작되었다. 비록 미국도 19세기 말엽에 식민지를 보유一그중 필리핀이 가장 눈에 띈다一하긴 했지만,식민주의에 만 족해본 적이 없었고 그보다는 해외에서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수단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기를 더 선호했다. 모스크바도 워싱턴도 유럽 제국들의 쇠퇴를 애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유럽 외부에서 힘의 공백이 생기고 있는데도 결과적으로 볼 때 처음에는 그 자리를 선점하려는 세력이 없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오래가지 못했다. 1949년 말에 유럽을 사이에 둔 소련과 미국의 경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다른 지역에서 기회를 잡으려는 유혹을 불러일으켰다. 스탈린은 그 유혹에 못 이겨 김일성이 남한을 침공하는 것을 승낙했다. 동시에 프랑스에 대항해 인도차이나에서 전쟁을 벌이도록 호찌민을 부추겼다. 이 연로한 독재자 스탈린은 ‘제3세계’에 관해 별로 아는 바가 없어서 소련 세력을 주입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흐루쇼프는 보다 정력적이었다. 그는 스탈린과는 달리 해외여행을 좋아했고,그런 기회가 생길 때 마다 마다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가 좋아했던 여행 목적지는 유럽의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 새로이 일어서는 신생 독립국들이었다. “나는 모험가가 아니다. 그러나 민족해방운동은 지원해야 한다.”라고 흐루쇼프는 설명했다. 


존 루이스 개디스, 냉전의 역사, 에코 리브르, 2010.pp.172-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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