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신저, 베트남 전쟁에서의 중국의 목표는? Le monde

키신저의 경고...

 

헨리 키신저는 <중국이야기>에서,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국과 중국의 장기적 전략적 이해관계는 유사했다고 강조했다. 즉 인도차이나 4개국(월맹,월남,캄보디아,라오스)의 세력균형이었다는 것이다.

 

1965년 마오쩌둥이 에드거 스노에게 전쟁의 예상 결과를 간단히 설명하면서월남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가능한 (따라서 수긍할 수 있는) 결과로 들었던 이유도,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키신저는 다음을 주장했다.

 

1971년 내가 비밀리에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저우언라이는 인도차이나에서 중국의 목표가 전략적인 것도 아니요이념적인 것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러니까 중국의 인도차이나 정책은 선대 왕조들이 초래한 역사적 부채에 오롯이 그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중국 지도자들은 미국이 패배할 리는 없다고 가정하고분단된 베트남 북부가 중국의 지원에 의존하게 되리라고 예상했던 모양이다. 한국 전쟁 이후의 북한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전쟁이 해를 거듭하면서 중국이 하노이의 승리에 내키지는 않지만 대비하고 있다는 몇 가지 조짐이 나타났다. 정보 당국은 라오스 북부에서 중국이 도로를 건설하고 있는 낌새를 알아챘다. 이 지역은 당시 벌어지고 있던 미국과의 갈등에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지만, 전후 베트남과 균형을 맞춘다든가 라오스를 두고 갈등이 불거지는 경우의 전략을 위해서는 쓸모가 있을 것이었다. 파리 평화 협정으로 베트남전이 끝난 다음인 1973년 저우언라이와 나는베이징에 망명하여 살고 있던 전 캄보디아 통치자 노로돔 시아누크와당시 프놈펜 정부와 크메르 루주 사이의 연합을 기반으로 한 전후 캄보디아 문제 해결을 협상하고 있었다. 하노이가 인도차이나를 접수하지 못하도록 장애물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런데 미 의회가 이 지역 내에서 미국이 더는 군사적 역할을 하지 못하도록 사실상 금지함으로써 미국의 역할이 무관하도록 만들어 버렸기 때문에결국 합의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I

 

당시의 동맹국을 향한 하노이의 숨어 있던 적대감은내가 19732월 불과 두 주일 전에 조인했던 파리 평화 협정의 시행을 위해 하노이를 방문했을 때 아주 생생하게 내 마음속에 새겨졌다. 레둑토가 나를 하노이의 국립 박물관에 데려갔는데중국이 여전히 형식적으로는 베트남의 맹방이지만 역사적으로는 베트남이 얼마나 중국과 투쟁해 왔는지를 보여 주려는 목적이 었다.

 

1975년 사이공 함락과 더불어 내재된 역사적 경쟁 심리는 동시에 드러났고이념을 억누른 지정학적 승리로 이어졌다. 베트남전의 의미를 잘못 평가했던 것은 비단 미국뿐이 아니었음이 밝혀진 것이다. 미국이 이 전쟁에 처음 개입했을 때중국은 제국주의의 마지막 발악쯤으로 보았다. 중국은 하노이와 거의 일상적으로 운명을 같이해 왔다. 그래서 미국의 간섭을 중국 포위를 향한 또 한걸음이라고 해석했던 것이다. 10년 전 미국의 한국 전쟁 개입을 바라봤던 것과 다름없었다.



역설적으로 베이징과 워싱턴의 장기적 이해관계는 지정학적 관점에서 봤을 때 동일해야 마땅했다. 양국 모두 인도차이나가 4개국으로 분할되어 있는 현상 유지를 선호했어야 마땅했다.



참고-


헨리 키신저, (헨리 키신저의)중국 이야기 , 민음사,2012,421-423. 




덧글

  • 2017/08/11 01:21 # 삭제 답글

    베트남 전쟁의 가장 큰 패배자는 중국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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