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신저의 경고...


한군전쟁 발발 직전에, 스탈린,모택동,트루먼,김일성,장개석은 냉전의 동북아 국제정세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주요 관심지역은 대만과 한국이었다.
김일성은 1949년-1950년 동안, 스탈린과 모택동의 협력과 갈등을 교묘히 이용하여, 남침의 묵인을 받으려 노력했다.
키신저에 따르면, 처음 두 사람은 모두 김일성의 제안을 거절했다. 마오쩌둥이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스탈린은 그러한 침공에 대해 마오쩌둥의 생각을 물었고, 마오쩌둥은 비록 그 목적에는 호의적이었으나 미국이 개입할 위험이 너무 크다고 관단했다. 그는 남한을 정복하려는 어떤 계획도,중국이 타이완을 정복함으로써 내전이 완전히 종료할 때까지 미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
스탈린은 모택동이 제2의 티토가 되는 것을 우려했다. 그는 모택동이 미국과의 손을 잡을 수도 있다고 보았고, 미중 관계를 악화시킬 방안을 모색했다. 이세기에 따르면, 스탈린은 미국과 중국을 동시에 제압하는 방법으로, 양국이 한반도에서 싸우도록 유도하여, 그들의 힘을 소진하게 하고, 상호 협력 가능성의 뿌리를 뽑으려 했다. 2)
1949년 북한의 김일성과 중국의 모택동이 스탈린에게 각각 북한의 남침과 중국의 대만 점령에 대한 승인을 요청했을때, 스탈린은 우선 순위를 정해야 했다. 한국 전쟁인가? 대만 점령인가? 전자에 우선 순위를 두면, 사회주의 동맹의 의무에 관한 부담을 주로 모택동에게 전가하면서,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에서 서로 싸우게 만들어 양국을 원수가 되게 해서, 모택동이 제2의 티토가 되지 않게 할 수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후자를 선택하면, 미국이 모택동의 대만 점령을 묵인할 수 있었고, 이를 계기로 미중 테탕트 조기 실현 가능성이 있었다.
실제로 트루먼 정부는 1949년 말과 1950년 초에, 미국이 모택동의 대만 점령을 묵인해 주는 대신에, 모택동을 아시아의 티토로 만드려는 정책을 시도했다.
1949년 12월 30일 미국 NSC 48/2의 결론은 다음이었다. “타이완의 전략적 중요성은 노골적인 군사적 행동을 정당화하지 못한다.”라고 결론내렸다.3)
1950년 1월 5일의 트루만 대통령 기자회견은 이 결론을 거듭 제기한 것이었다. “미국 정부는 타이완의 중화민국 군대에 군사 지원이나 고문단을 제공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대만이 중국의 일부이며 미국은 대만에 군사기지를 만들 어떤 의도나 특권도 없으며 대만에 군사원조도 하지 않을 것이다. 대만은 자체 방어를 위한 적절한 자원을 스스로 가지고 있다.
그리고 1월 12일 국무장관 애치슨 연설은 중국의 모택동에게 '아시아의 티토'가 되라는 유혹에 다름아니었다. 미국은 대만 문제에 대한 양보를 통해서, 모스크바와 베이징의 불화를 원했던 것이다.
한국 전쟁이냐 대만 침공이냐의 문제는 대만 장개석 측의 사활적 문제이기도 했다. 1949년 4월 29일 한국 주재 대만대사 예정자 샤오위린, 정세보고 (샤오위린 Shao Yulin (1909-1984))는 다음과 같았다.
"우리는 국제적으로 구립무원의 상태에 빠져가고 있습니다. 만일 중공이 타이완을 먼저 진공해 오면 그 결과는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남한 또한 국제 공산주의자들의 침투와 무장 유격대의 협공으로 어려움에 처할 것입니다. 반대로 국제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을 먼저 공격한다면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지원이 투입될 것입니다. 그 와중에 우리는 위기에서 벗어날 한줄기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모택동이 한국전쟁 개입 이전에 1950년 여름으로 예정되었던 대만 침공을 단행했다면, 미국 트루먼 행정부의 방침에 따라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미국의 대만 불개입을 통해, 미국과 중공이 데탕트 관계를 구축할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택동은 김일성을 지원하면서, 미국을 적으로 만들고, 대만 통일 기회도 날려버렸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전자가 먼저 진행되었다면, 중소관계의 분열을 위한 미국의 쐐기전략이 통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스탈린으로서는 김일성이 먼저 남침을 하고, 한국전쟁에 미군이 개입하여 중공군과 교전하여, 중공과 미국을 원수지간으로 만들때, 스탈린의 미중 관계에 대한 쐐기전략의 실현을 기대할 수 있었다.
1950년 5월 15일의 모택동, 김일성-박헌영과 회담에서, 모택동은 북한에게 중국이 대만을 점령한 후에 대남작전을 시작하면 북한을 충분히 도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제안했다. 여전히 모택동은 대만해방의 의지와 가능성을 버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김일성의 남침이 먼저 실현되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 소식에 장개석은 "우리들의 때가 온 것이다."라고 만족감을 표시했다고 한다.
1) 헨리 키신저, 『 (헨리 키신저의)중국 이야기 』, 민음사,2012,p.161.
2) 이세기, 6.25 전쟁과 중국 스탈린의 마오쩌둥 제압전략, 나남, 2015.
3) 헨리 키신저, 『 (헨리 키신저의)중국 이야기 』, 민음사,2012,p.156.
덧글
스탈린이 중간에서 이를 소련의 국익에 맞게 조정했다고 봅니다.
샤오위린 대사가 한국에와서 한 외교활동이 궁금합니다.
대만이 살기 위해서는 김일성의 남침이 절실했던 대만 입장에서
대사가 이박사를 만나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궁금합니다. ㅠ
한국전쟁 개설서를 보시면 이 박사의 인식에 대해서는 개략적으로 소개가 되있을 것으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