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루쇼프, 모택동에 대한 스탈린의 냉대? Le monde

키신저의 경고...




돌이켜 보면, 중소동맹의 역사에서 그나마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스탈린 사망 동안은 비교적 우호적이었던 시기였다고 할 수 였다. 그런데 이런 우호의 분위기 속에서도 갈등의 불씨는 생겨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9년 12월, 중화인민공화국 선포 2달만에 모택동이 방문한 곳은 모스크바였다. 

모택동은 스탈린에게 중국-소련 군사동맹을 간청했지만, 한동안 스탈린은 이에 부정적이었다. 

키신저에 따르면, 사실 당시 스탈린은 중국이 국력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줄 생각이 거의 없었다. 그는 유고슬라비아의 티토의 변절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 

이렇게 군사동맹을 원하는 모택동에게 스탈린은 중국의 평화를 위협하는 요소는 “김일성이 중국을 침략하겠다고 결심하는” 경우 밖에 없다고 놀리듯 말하면서, 중소 동맹 요청을 회피하려 했다.

스탈린의 리더십은 잔혹하고 시니컬한 마키아벨리즘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2) 

흐루쇼프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스탈린은 자신을 찾은 소중한 손님들에게 환대하는 모습을 과시하기를 좋아했으며, 그런 일에 아주 능숙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이 방문했을 때의 스탈린은 어떨 때는 며칠씩 그의 얼굴조차 보지 않았으며,딱히 누구에게 손님을 접대하라는 지시도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마오쩌둥을 보러 가려 하지 않았다.……마오쩌둥은 그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귀국길에 오르겠다는 뜻을 숨기지 않았다. 스탈린은 그의 불평을 듣고서야 다시 한번 만찬을 함께했던 것으로 기억된다.”3) 

1) 헨리 키신저, 『 (헨리 키신저의)중국 이야기 』, 민음사,2012,p.150.

2) 헨리 키신저, 『 (헨리 키신저의)중국 이야기 』, 민음사,2012,p.151.

3) 헨리 키신저, 『 (헨리 키신저의)중국 이야기 』, 민음사,2012,p.152.


미중소 3각관계라는 관점에서, 중소동맹 성립기의 갈등은

소련은 모택동이 제2의 티토가 되지 않을까 두려웠다면, 미국은 모택동을 아시아의 티토로 만들려했다.

소련과 미국은 중국의 모택동에 대해 각각의 쐐기전략을 구사하고자 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전쟁은 스탈린의 쐐기전략이 전략이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한국전쟁을 통해서 스탈린은 중국과 미국을 원수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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