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스탈린 사망과 첫번째 데탕트...
키신저의 경고...

<스탈린 사망 1953년>

일반적으로 데탕트하면 헨리 키신저의 데탕트를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냉전의 역사에서 데탕트가 아니라 데탕트 "들"이 존재했다.

첫번째 데탕트 기회는 1953년이었다. 1953년 스탈린 사망 직후 일부 소련 지도자들이 동서간의 긴장완화를 위한 시도를 했다.
 
같은 해 3월 중순, 스탈린 장례식에서 말렌코프가 평화적 수단을 사용하여 해결되지 못할 문제는 없다고 선언한 것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였다.  

Antony Best, Jussi Hanhimaki, International History of the Twentieth Century and Beyond , Routledge; 2 edition (August 1, 2008),p.232.

소련의 새로운 평화공세는 크렘린 지도자들이 느낀 불안의 결과였다. 흐루쇼프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스탈린의 죽음에 이르는 날들 동안 우리는 미국이 소련을 침공할 것이고 우리는 전쟁에 돌입할 것이라 믿었다.” 

블라디슬라프 주보크, 실패한 제국 -냉전시대 소련의 역사 1,아카넷,2016.p.221.

하지만 소련의 평화 공세에 대해 서구가 의심할 이유는 충분했다. 가령, 중립화된 독일의 재통일에 대한 소련의 제안이 그랬다. 또한 첫번째 데탕트는 1953년 7월 동베를린에서 발생한 폭동의 탄압으로 약화되었고, 동시에 소련 지도부 내부에서 긴장완화를 주장하는 파벌의 지위가 하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장완화를 위한 소련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새로운 소련의 유연성은 한국전쟁의 종결을 가능하게 했고, 평화조약 체결을 통해서 오스트리아로부터 소련군이 철수했다. 소련은 또한 그들의 유일한 해외 기지로부터 일방적으로 철군,철수를 했다. : 핀란드의 항코, 만주의 대련. 소련은 이 두 곳을 전후에 부당한 조약을 통해 획득한 바 있었다. 

긴장완화를 위한 동서 지도자의 회의가 개최된 곳은 1955년 제네바였다. 하지만 1956년 헝가리 봉기에 대한 잔인한 진압으로 이른바 <제네바 정신>은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몇년 동안, 미소 고위급 지도자들 간의 상호방문이 있었다. 1959년에만 소련 부총리 미코얀, 미국 부통령 닉슨, 그리고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서기장이 상호 방문했다. 아이젠하워의 소련 방문도 계획 중이었다. 하지만, 예정된 방문과 파리에서 다자간 정상회담은 러시아의 중부 지역에서 미국의 U-2 정찰기가 격추되면서 무산되었다. 


참고-

Raymond Garthoff, Detente and Confrontation: American-Soviet Relations from Nixon to Reagan,  Brookings Institution Press,1985. 6-7.





by 파리13구 | 2017/07/17 17:19 | Le monde | 트랙백 | 덧글(2)
트랙백 주소 : http://kk1234ang.egloos.com/tb/3072874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전위대 at 2017/07/17 18:28
베리야는 대놓고 독일 통일까지 주장했다가 스파이로 총살 -ㅅ-
Commented by 파리13구 at 2017/07/17 21:42
인간 백정이었기 때문에...ㅠ

:         :

: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비공개 덧글



<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