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공산화 이후의 인도차이나... Le monde

키신저의 경고...

<사이공 미국 대사관에서의 탈출, 1975년>


1975년 4월 29일, 남베트남의 사이공 미국 대사관 인력이 헬기로 철수했다.

그리고 4월 30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베트남 공화국의 수도 사이공을 점령, 베트남이 공산화되었다.

무력 통일 직후, 하노이는 여러 장애물을 만났다. 우선 오랜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면서 재건을 위한 인적 자원이 고갈되었다. 

중국-베트남 관계는 1960년대 말부터 이미 악화되기 시작되었고, 중국이 군사,경제 원조를 줄이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1978년에 중국은 베트남에 대한 모든 원조를 중단했다. 그 결과로, 베트남은 소련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통일의 결과, 모스크바에 대한 하노이의 종속이 심화되었다.

캄보디아에서 1975년 이후 상황은 최악이었다. 크메르 루즈의 폴 포트의 지도 아래, 대학살극이 있었다. 폴 포트는 1975년은 새로운 캄보디아를 위한 0년으로 선포했고, 크메르 루즈는 나라의 부르주아 소탕에 나섰고, 공산주의 유토피아 건설에 나섰다. 많은 도시 주민들이 시골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도서관,학교,사원이 파괴되었다. 1975년-1978년 동안 대략 2백만의 캄보디아인들이 학살당했고, 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탈출했다. 

보다 인구가 많고, 군사력이 강한 베트남으로부터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 폴 포트 체제는 중국과의 유대를 강화했다. 중국은 인도차이나에서 소련에 지원을 받는 베트남 패권의 등장을 막으려 했다. 

결국 1978년 12월,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략했다. 폴 포트가 축출되고, 크메르 루즈를 대체하는 꼭두각시 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러자 중국이 1979년 2월에 베트남을 침공했다. 이 전쟁으로 3만 5천명이 사망했다.  그러는 동안, 폴 포트가 군대를 규합하여, 캄보디아에서 게릴라 전쟁을 벌였다.

1989년까지 베트남 군 10만 명이 캄보디아에 주둔했다.

동남아에서의 공산주의의 계속된 팽창에 대한 미국의 공포는 과장된 것이었다.


참고-

Jussi M. Hanhimaki,The Rise and Fall of Détente - American Foreign Policy and the Transformation of the Cold War, Potomac Books,2012. 8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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