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혁명과 홍콩 그리고 모택동" Le monde

키신저의 경고...

<모택동 어록이 담긴 붉은 수첩을 들은 홍콩의 시위대
1967년 5월 16일>

1967년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중국은 홍콩 문제를 '힘'로 해결할 수 있있다. 힘도 있었고, 명분(반-제국주의)도 있었다. 하지만 모택동의 판단은 어떤 것이었을까?  

1966년에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4대악 타파를 목표로 했다. 낡은 사상[舊思想], 낡은 문화[舊文化], 낡은 풍속[舊風俗], 낡은 관습[舊習慣]을 타파(打破)하려 하다가 중국을 막장의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문혁을 혼란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자제의 움직임이 포착될 수 있는 것은 홍콩 문제였다. 홍위병은 홍콩에서의 영국 제국주의 타도를 주장하고, 광저우의 인민해방군은 홍콩 침공을 준비하는 상황에서, 1967년 홍콩의 친중 좌익세력은 영국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폭동을 일으켰다. 

1967년 5월에 시작된 홍콩 좌익 봉기는 공산주의 동조세력이 주도한 대규모 시위 사태였다. 작은 노동쟁의로 시작된 사건이 영국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대규모 시위로 발전했다.  시위대가 홍콩 경찰과 폭력 대치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에 영향을 받은 홍콩 좌익이 낡은 관습인 영국의 제국주의 타도를 위해 봉기한 것이었다. 이 봉기는 좌익이 폭탄 테러에 나서면서 더욱 폭력적이 되었다.

대륙의 홍위병은 홍콩 좌익과의 연대를 위해서, 6월 100만 홍위병이 베이징의 영국 임시공사관에서 항의 시위를 했다. 8월에는 베이징의 영국 임시공사관이 방화 공격을 받았다. 

한편, 중국 인민해방군 광저우 지역 사령관, 황영생  Huang Yongsheng (그는 린바오 -Lin Biao,임표-의 최측근이었다)이 비밀리에 홍콩 침공 및 점령을 제안했지만, 중국총리 주은래가 이를 거절했다. 

문혁과 홍콩을 둘러싼 혼란 속에서, 주은래가 모택동 주석에게, 홍콩을 영국으로부터 되찾을 때가 온 것인지 물었다. 그러자 모택동은 아직 때가 아니다고 했다. 마오는 1997년까지 영국의 홍콩 지배를 보장한 조약의 약속을 지킬 것이라 다짐했다. 

결국 주은래 총리는 홍콩에서의 봉기의 즉각적인 중단을 지시했다. 홍콩 봉기는 이렇게 끝장났다. 


참고-

Ching Cheong, "Is a Sub-Cultural Revolution Threatening Hong Kong?", The NewYork Times, MAY 5, 2017

위키백과, Hong Kong 1967 leftist riots.


문혁 시절의 모택동 조차도 조약의 약속, 특히 영국 제국주의의 강압에 의한 역사적 굴욕의 산물이라 하더라도, 조약의 의무에 충실하려 했다. 

적어도 홍콩 문제에 관련해서는 모택동에게 다음 격언은 역시 진리였다 ; 팍타 순트 세르반다(pacta sunt servanda) 즉, 약속은 지켜져야만 한다.



덧글

  • 파파라치 2017/06/26 11:15 # 답글

    당연히 모택동이 신의가 있어서 그런게 아니라 국제적 파장을 고려한 결과였겠지만, 스탈린도 그렇고 국내 정책에서는 거의 조현병적 작태를 보였던 공산권 독재자들이 대외 관계에 있어서는 대체로 국익에 충실한 결정을 내렸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는 분단이 고착화되었지만...)
  • 파리13구 2017/06/26 11:21 #

    스탈린이 공산주의 광신도가 아니라는 것은

    키신저가 강조하는 바입니다. 그는 붉은 마키아벨리주의자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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