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신저의 경고...


물론 중등교육의 수준에서 조지 캐넌의 봉쇄정책의 이념적 기초를 묻는다면, 반공주의라 답하면 크게 문제될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학 수준의 논의에서, 캐넌의 봉쇄정책을 순수한 반공주의라 이해하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다.
봉쇄가 반공이라면, 당시의 모택동의 중화인민공화국도 그 대상이 되어야 논리에 부합한다. 하지만, 캐넌은 모스크바와 공산주의를 구별했다.
존 루이스 개디스에 따르면, 조지 캐넌이 제안한 봉쇄정책의 대상은 소련이었고, 공산주의가 아니었다. 즉 트루먼 행정부의 정책은 1947-1950년 동안 세계 공산주의 운동을 단일대오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스크바에 복종하는 것이 봉쇄의 목표물이었지, 맑스-레닌주의를 추종하는 것이 대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적으로 공산주의라 하더라도 소련의 지도력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체제는 심지어 미국의 원조를 기대할 수도 있었다. 모스크바의 사주를 받지않는 토착 세력의 공산주의와 미국이 손을 잡을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워싱턴은 1948년에 티토의 이탈을 재빠르게 간파하고, 미국에 유리한 것으로 만들었다. 비록 유고슬라비아가 공산주의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트루먼의 중국정책도 모스크바와 북경간의 심각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믿음에 기반했다.트루먼 대통령은 반덴버그에게 "러시아인들이 중국에서 '외국의 악마'임이 드러날 날이 올 것"이며, "그 상황이 우리가 승인하고 지지할 중국 정부의 수립에 도움이 될 것"이라 전망했었다. 말하자면, 당시 미국정부는 국제적 상황을 제로섬 게임으로 보지 않았다. 즉 공산주의의 이득이 미국 안보의 손실을 반드시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 Gaddis, John Lewis. "Was the Truman Doctrine a Real Turning Point?" Foreign Affairs 52, no. 2 (1974),p.392.
캐넌의 봉쇄정책의 두번째 전제는 스탈린은 히틀러와 다르다는 것이었다.
소련의 팽창을 위협으로 인식함에도 불구하고, 조지 캐넌은 스탈린의 위협을 히틀러의 그것과 구분했다. 후자가 세계정복을 위한 구체적인 시간계획을 가진 세계정복을 위한 위협적 도발이었다면, 스탈린의 그것은 이와 다르다는 것이었다.
캐넌에 따르면,“소련 권력자들은 히틀러 치하의 독일과는 다르다. 계획적이지도 않고,모험주의적이지도 않다. 소련은 계획을 세우고 움직이지 않는다. 소련은 쓸데없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 이성의 논리가 소련에 개입할 여지는 없다. 소련은 무력의 논리에 민감하다. 이런 이유로 강력한 저항에 부딪치면 소련은 었제라도 쉽게 물러난다 (대개가 그렇다). 따라서 적이 무력을 충분히 확보하고, 사용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음을 명확히 한다면 소련이 실제로 문제를 일으킬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히틀러와 스탈린이 만드는 위협의 본질이 다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서양의 대응도 달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히틀러의 위협에 대해서는 전쟁이 불가피하지만, 스탈린의 그것에 대해서는 전쟁 보다는 외교적 봉쇄가 보다 적절한 대응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개디스에 따르면, 역설적이게도 캐넌은 소련이 세계 혁명을 추구한다고 믿지 않았다고 한다. 맑스-레닌주의 이데올로기는 억압적 체제를 정당화하는 조야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지, 무제한적 팽창을 위한 청사진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캐넌에게, 소련의 서유럽 침공은 전혀 그럴듯해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러시아가 동유럽의 위성국가들을 통제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1946년 10월에 캐넌은 다음을 주장했다 : "나는 소련 지도자들이 소련의 서부,남부 변경에 공산주의 형태의 정부들을 수립하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은 실수라 생각한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그 국가들의 정부가 소련의 영향력과 권위에 순종하게 만드는 것이다. 핵심은 이 정부들이 모스크바의 지도에 따라야만 한다는 것이다."
- John Lewis Gaddis, The United States and the Origins of the Cold War, 1941–1947. New York, NY: Columbia University Press. 1972.pp.322-323.
냉전사의 대가인 존 루이스 개디스는 영국 이코노미스트와의 대담에서, 조지 케넌의 봉쇄정책의 원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코노미스트- 봉쇄정책은 어떤 것이었나?
개디스- (전후의 소련에 대해서) 전쟁 혹은 유화라는 양 극단 사이에서 제3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봉쇄정책은 제3의 길이었다.
케넌에 따르면, 스탈린은 히틀러와 달랐다. 히틀러와는 달리, 스탈린에게는 고정된 침략 시간표 같은 것이 없었다. 물론 스탈린도 유럽을 지배하고자 했고, 가능하다면 세계 정복도 원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위해 서두르지 않았다.
따라서 만약에 미국과 그 동맹국이 전쟁 혹은 유화가 아니라, 참을성을 가지고 소련의 팽창을 충분히 오랫동안 봉쇄한다면, 러시아인들이 그들의 우선순위를 변경할 것이란 전제를 가지는 것이 바로 봉쇄정책이었다. 만약 우리가 소련의 팽창에 대해 비도발적 저항이라는 일관성있는 전략을 발전시킨다면, 전쟁도 유화도 아닌 이 제3의 길이 소련을 타협 혹은 심지어 소련의 붕괴로 이끌 것이란 전망이었다. 케넌은 소련 체제의 내부 모순 때문에 소련이 붕괴될 것이라 예상했다.
이런 전제하에서 그가 처음으로 제안한 것이 바로 마셜 플렌 Marshall Plan 이었다. 마셜 플렌은 서유럽의 부활을 미국이 돕자는 것이었다. 이는 유럽이 절망에 빠지지 않게 만들어, 유럽이 소련을 대안으로 간주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출처-
"A conversation with Kennan's biographer",The Economist, Nov 28th 2011
1989년의 한 대담에서 개디스는 조지 캐넌의 봉쇄정책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질문- 캐넌 전략의 핵심은 무엇인가?
개디스- 캐넌의 전략은 러시아와 전쟁도 아니고, 러시아에 대한 항복도 아닌 방법을 모색하자는 것이었다. 정책의 논리적 전제는 러시아가 당분간 전쟁을 도발하지 않을 것이며, 심지어 러시아가 서유럽을 공격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당시 서유럽은 전쟁으로 탕진된 상태였고, 심리적 사기가 매우 낮았고, 러시아는 공산당 조직이나 협박만으로도 유럽인들을 굴종상태에 이르게 만들 수 있다는 위험이 존재했다. [역자주- 냉전은 군사력 보다는 심리의 문제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캐넌의 봉쇄정책은 서유럽인들의 사기를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었고, 특히 경제적 안정감을 심어주기 위한 것으로, 사기 회복을 통해서 서유럽인들이 소련의 위협에 저항심을 가지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질문- 캐넌의 봉쇄정책의 3대 원칙은, 유럽을 독자적 세력 중심지로 부활시키는 것, 공산권의 분열을 촉진하는 것, 국제관계에 대한 소련의 입장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는가?
개디스- 첫째 원칙은 방금전에 말한 것이다. 가장 시급했던 것으로, 유럽의 세력균형을 회복시키는 것이었고, 서유럽을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마셜 플랜이 결정적이었다.
캐넌은 소련의 위협은 영원한 것이 될 수 없다고 믿었다. 두 가지 이유에서 였다. 첫째,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모스크바의 통제가 쇠퇴할 것이며, 국제 공산주의 운동 역시 쇠퇴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1945년, 국제 공산주의는 단일체인 것으로 보였지만, 캐넌은 이 대오가 붕괴할 것이라 전망했다. 이 붕괴를 미국이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가 그의 관심사였다. 둘째, 국제 공산주의 운동이 쇠퇴하고, 서유럽의 힘이 부활되면, 국제정치에 대한 소련의 태도도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캐넌은 전망했다. 러시아가 곧 바뀔 것이란 확신이었다. 캐넌은 10년 정도 후에 이것이 가능할 것이라 보았다.
John Lewis Gaddis Interview: Conversations with History; Institute of International Studies, UC Berkeley,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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