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말, 흐루쇼프와 모택동의 갈등... Le monde

키신저의 경고...


<소련은 혁명세력인가?>

1950년대 말이 되면 공산주의는 더 이상 단일체가 아니었다. 소련과 모택동의 중화인민공화국은 노골적으로 분열하여 대립했다. 두 광적인 독재자들 사이에 개인적 적개심도 있었고 중국의 원자탄 개발을 저지하려는 소련에 대한 중국의 분노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서방과의 "평화 공존’을 내세운 흐루쇼프 독트린이었다. 이 독트린은 미소 경쟁 관계의 종료를 의미하는 건 아니고,3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소련의 확장을 계속한다는 것이었다. 흐루쇼프는 소련의 새로운 국력으로 이런 목표가 실현 가능하리라고 자신했다. 실제로 그의 국내외 프로그램은 미국과의 데탕트를 전제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오는 ‘무장 투쟁’의 수사를 아직도 늘어놓고 있었고 심지어 공산권의 인구가 더 많다면서 핵전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1958년 당 간부들에게 이런 오싹한 말을 했다. “만약 29억 인구 중에서 9억이 남는다면 5개년 계획을 여러 번 해서 자본주의를 완전히 쓸어내고 영원한 평화를 확립할 수 있다.”16 흐루쇼프는 마오를 광인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중국은 이제 공산권과 개발도상국들의 종주국 지위를 노리고 있었다. 소련은 이미 보수 반동 국가가 되어버렸고 이 때문에 중국은 소련도 경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데이비드 레이놀즈, 정상회담, 책과함께,2009.pp.239-240.

에릭 홉스봄, 데탕트는 흐루쇼프 집권과 더불어 등장했다.

극단의 시대에서 에릭 홉스봄은 데탕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데탕트는 스탈린 사후의 난투 끝에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흐루시초프(재임 1958-64)가 소련에서 대권을 쥐었던 1950년대 말에 처음으로 나타났다. 개혁과 평화공존의 신봉자 —— 덧붙여 말하자면 스탈린의 정치범수용소를 비운 —— 인,다듬어지지 않았으나 뛰어난 자질을 가진 이 감탄할 만한 인물이 다음 몇 년간 국제무대를 지배했다. 그는 또한 아마도 지금까지 주요 국가를 통치한 유일한 시골 사내이기도 했다. 그러나 데탕트는 우선 흐루시초프의 허세를 부리고 충동적인 결정을 내리기를 좋아하는 성향과 금세기의 가장 과대평가된 미국 대통령인 J. F. 케네디(재임 1960-63)의 제스처 정책 사이의 유별나게 팽팽한 대결을 한동안 통과해야 했다. 따라서—지금은 상기하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 자본주의 서방이 공산주의 경제 —— 1950년대에 서방 자신의 경제보다 빠른 속도로 성장한—— 보다 뒤처지고 있다고 느꼈을 때,위험수위 높은 두 운영자가 두 초강대국을 이끌었던 셈이다. 공산주의 경제는 소련의 첫 인공위성과 우주비행사의 극적인 승리를 통해서 미국에 대한 (단명한) 기술적 우위를 막 입증하지 않았던가? 더욱이 ——모두에게 놀랍게도 —— 공산주의가 플로리다에서 몇십 마일밖에 떨어지지 않은 나라인 쿠바에서 막 승리하지 않았던가? 

에릭 홉스봄, 극단의 시대 :20세기 역사,까치,1997.p.340.

-평화공존의 신봉자인 흐류쇼프가 쿠바 미사일 위기의 주인공이 된 것은 설명이 필요하다. ㅠ 

왜 흐루쇼프의 평화공존은 쿠바 미사일 위기로 끝장이 난 것일까?  

중소의 갈등이 10년만 먼저 등장했다면 냉전의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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