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신저의 경고...


냉전 초기 미국이 소련과의 전쟁 계획을 처음으로 수립한 것은 1946년 6월이었다. 핀처 전쟁계획 Operations for Pincher이 바로 그것이다. 계획에 따르면, 한국의 군사전략적 가치는 낮았고, 소련과의 전쟁 발생시 철수한다는 방침이 수립되었다.
최초의 전쟁계획인 1946년 핀처 작전개념 Concept of Operations Pincher은 소련과의 전면전이 일어날 경우 극동에서는 미군이 공군력으로 아시아 대륙의 적 목표물을 공격하기 위해 일본, 특히 오키나와를 중심지로 기지를 건설하기로 했다.
극동지역 미군의 임무는 알류션열도-일본-류큐열도(오키나와)-필리핀을 잇는 도서사슬을 방어선으로 확보하는 것이 골자이다. 핀처 작전개념은 이와 아울러 남한에 주둔 중인 2개 사단의 병력을 포함한 약 5만7,000명은 소련과의 전면전의 경우 소련군의 침입으로 입을 손실을 막기 위해 신속하게 일본으로 사전 이동하도록 했다.
비록 핀처 작전개념이 합참의 승인을 받지 못했지만, 1946년 11월 맥아더의 다음 발언은 핀처 작전개념에 부합되는 것이었다. 핀처 작전개념이 완성된 8개월 후인 1946년 11월 극동군최고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소련과 전면전을 벌일 경우 남한에 주둔중인 하지(John R. Hodge) 장군 휘하의 24군단 소속 2개 전투사단은 일본방어를 위해 철수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런 작전 개념을 가지고 있었던 맥아더가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축하식에 참석해서 다음 발언을 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즉 맥아더는 이승만이 미군의 지원에 대해 묻자 남한이 공격을 받는다면 미국은 “캘리포니아 주를 방어하는 것처럼” 남한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거라고 약속했다고 한다.
김종환의 박사논문은 핀처 계획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핀처 전쟁계획 Operations for Pincher
미국은 1946년 6월에 소련과 전면전쟁에 대비한 작전계획(Concept of Operations for IPincher)을 만들었다. 이 계획은 전쟁이 어떻게, 어디에서 시작될 것이며, 이때에 미국 동맹국이 공격자를 어떻게 항복을 시킬 것 인가에 대한 최초의 작전 경로, 전략적 접근 방법들을 기술함으로써 전쟁 계획을 입안하는 것이었다.
핀처 전쟁 계획에 의하면 소련은 최초에 전면전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나, 국지전이 전면전쟁으로 확대될 것이라는 가정 하에 출발하고 있다. 미 · 소간의 전쟁은 1946년 여름과 1947년 여름사이에 일어날 것이며, 전쟁의 최초 발생지역은 중동이 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전쟁이 발생 하면 소련은 소련의 경제적, 산업적으로 사활적인 이해가 있는 그들 국경을 연하는 동 유럽 국가들과 만주지역에 방어선을 확보하는 데 최대 역점을 둘 것이라고 보았다.76) 장차 전쟁이 일어날 경우 소련은 압도적
으로 우세한 지상병력으로(유럽정면에서 100개 사단) 공격할 것으로 분석하였다. 미국은 소련의 우세한 지상군 전력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였다. 즉, 소련이 서유럽을 공격할 경우 미국과 영국은 라인(IRhine) 강에서 대적하기 보다는 소규모 병력으로 소련의 대병력을 저지할 수 있는 유리한 지역인 이베리아 반도나 이탈리아반도까지 후퇴한 후 전략 폭격으로 소련의 전쟁수행능력의 핵심인 우크라이나 등의 공업중심지를 격파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미국은 전력을 보강한 후 소련이 지상군 우위능력을 발휘할 수 없도록 반격작전을 실시하되, 반격 작전의 기동로는 지중해에서 발칸반도, 아니면 지중해나 페르시아 만으로, 이 중에서 한 방향 내지는 양방향에서 중동지역으로 기동하여 소련의 공업 중심지역을 공격한다는 것이었다.77) 미국은 클라우제비츠(Karl von Clausewitz)가 전쟁론에서 강조한 ‘군사력 중심(重心: center of gravity)'을 우세한 전략폭격기를 이용하여 조기에 파괴함으로써 소련의 전투의지를 말살시킨다는 개념이었다.
미국은 핀처 계획에서도 서유럽과 중동지역을 중요시 하였다. 핀처 계획에서는 장차 미 ·소간의 직접대결상황을 고려하여 영국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즉, 미국은 장차 소련과의 전면전을 고려할 때 영국을 강대국으로 유지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했다.78) 또한 핀처 계획에서는 소련과의 전쟁시 미국이 판단한 지역우선 순위는 서유럽, 중동, 극동지역 순이었다. 미 · 소간의 전면전쟁이 발발할 경우, 극동지역은 세계적 전략적 관점에 볼 때 미 · 소 양국 모두 부담이 되는 지역이었다. 미국은 소련과의 전면 전쟁시 핵무기를 사용해 소련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얻고자 하는데 미국이 보유한 핵무기를 극동지역까지 적용하기에는
부족하였다. 따라서 미국은 서유럽지역에서는 적극적 전략인 ‘전략적 공세(strategic offense)'를 취하고 극동지역에서는 소극적 전략인 ‘전략적 방어 (strategic defense)'를 채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
한편 핀처의 전쟁계획 수립과정에 참여했던 핵전문가들은 핵무기의 운용에 대해 비관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그 당시 미국의 핵무기는 전략 무기로 사용할 수 없으며, 재래무기와 재래전쟁을 수행하는 보조적인 역할밖에 기대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 80) 미국의 원폭보유량도 동원해제로 줄어들어 1947년에서 1948년에는 30~40발 정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81) 또한 1946년 3월에는 육군항공은 방공, 전술공군, 전략공군으로 재편되어, 이 시점에서 전략공군이 보유한 B-29폭격기는 13개 비행단 가운데 가용한 부대는 6개 비행단뿐이었다. 핵전문가들의 견해에 의하면 “그 중 에서도 핵무기 공격능력을 갖춘 부대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출격했던 제509비행단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런데 이 부대마저도 동원해제에 따른 전문 인력의 사회복원으로 인하여 훈련수준이 낮아졌다고 말했다.82) 그럼에도 미국은 핵 독점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의 군부에서는 여전히 핵무기를 높이 평가하고, 이를 대소전쟁계획에 반영하였다. 미국 군부가 이렇게 판단한 것은 공군의 핵 공격을 대체할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83)
이 핀처 계획에 따르면 이탈리아와 지중해 지역을 포함해서 한국도 전쟁의 초기 단계에서 소련에 포기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84)
전쟁이 발생하면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지상군은 일본으로 철수해서 혼슈, 큐수, 훗가이도 등의 일본 본토 방위로 전환할 것을 계획하고 있다.85)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1948년 2월 미국 최초의 전쟁계획인 핀처 계획을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는 1947년 7월 26일 국가안전보장법이 제정되고 이에 따라 국가안보체제가 그 모습을 갖추어지는 시기와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종환,애치슨의 태평양 방위선과 한국전쟁,박사논문,경남대학교,2007.pp.4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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