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먼 독트린과 미국 국방예산의 모순... Le monde

키신저의 경고...



1947년 3월 12일 트루먼 독트린은 대통령 스스로 "미국 대외정책의 일대 전환점"이었다고 믿었던 사건이었다. 트루먼은 다음을 공약했다. “나는 무장한 소수나 외부압력에 의한 정복 기도에 저항하고 있는 자유인들을 지원하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만약 트루먼 독트린이 미국의 국익과 무관하게, 세계의 어든 지역에서이든 공산주의의 위협에 억압받는 자유민이 존재한다면, 미국은 그들을 지원할 것이란 약속을 의미했다면, 이는 당시의 미국 국방예산 수준과 모순되는 것이었다. 

종전 이후 미국은 군규모와 국방예산을 크게 감축 중이었다. 종전 직후 1200만명이있던 군인 수는 1947년 150만으로 줄었고, 전시에 최고 909억 달러까지 올라갔던 국방 예산은103억 달러까지 떨어졌다. - 트루먼 독트린 당시 미국의 일년 국방예산은 150억 달러에 불과했다. [Gaddis, John Lewis. "Was the Truman Doctrine a Real Turning Point?" Foreign Affairs 52, no. 2 (1974),p.395. ]

미국이 트루먼 독트린 수준의 세계정책을 감당할 수 있는 국방예산을 확보하게 된 것은 1950년 4월의 국가안보회의 문서 제68호 덕분이었다. 조지 캐넌의 후임으로 정책기획실장이 된 폴 니츠를 중심으로 국무부가 국방부와 긴밀한 협조 속에서 작성해 1950년 4월 14일 대통령에게 제출한 보고서가 바로 NSC-68 이었다. NSC-68은 국방비를 세 배 늘려야한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냉전의 군사화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렇다고 트루먼이 50년 4월에 NSC-68을 바로 승인한 것은 아니었다.  핼버스텀에 따르면, - (한국전쟁 발발 당시) 트루먼 대통령은 NSC-68을 최종 승인하지 않고 한국 상황을 지켜보던 참이었다.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 p.295]

위키백과에 따르면, 트루먼이 NSC-68에 공식 서명한 것은 1950년 9월 30일이었다. 원래 이 문서는 극비문서였는데, 비밀이 해제된 것은 1975년이었고, 해제를 결정한 사람은 헨리 키신저였다. 

4월 14일, 이 보고서를 읽은 트루먼은 보고서의 주장에 대해 유보적이었다. 미국 납세자에 대한 부담이 될 증세가 불가피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가운데, 트루먼의 고민을 날려버릴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은 바로 6월 25일의 한국전쟁 발발이었다. 사문화될 위기에 있던 NSC-68을 살려준 것이 바로 한국전쟁이었다. 트루먼이 50년 9월 30일이 이 보고서에 서명한 것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국무부의 한 관리는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한국이 우리를 구했습니다."라고 했다. 한국전쟁에서의 공산주의 세력의 침략 덕분에, 미국 정부가 군비 지출 증가의 확실한 명분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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