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월 루스벨트의 소련 인식은 ? Le monde

키신저의 경고...


전후 동유럽의 운명이 결정된 것은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였다. 얄타에서 루스벨트가 스탈린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했다는 비판이 존재했다. 하지만 루스벨트로서는 유럽 뿐만 아니라 아시아 문제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로서는 문제를 글로벌한 시각에서볼 수 밖에 없었다. 만주에는 일본군이 70만 명이 주둔 중이었다. 따라서, 루스벨트의 딜레마란 스탈린과의 협상에서 동유럽의 주권과 자유를 강조하다 보면, 태평양전쟁으로 소련을 끌어들이는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만약 소련의 대일전 참가가 차질을 빚으면, 미군의 사상자 수도 증가할 수 밖에 없었다. 동유럽을 위해서 미국의 아들들이 더 많은 피를 흘려야 되는가? 그것이 루스벨트의 문제였다.

루스벨트에 비해서, 처칠이 소련에 대해 상대적으로 강경할 수 있었던 것도 영국이 태평양전쟁에 대한 이해관계가 강하지 않았고, 유럽 문제에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칠이 유럽적이었다면, 루스벨트는 글로벌했다.

얄타 회담이 열리기 한달 전인 1945년 1월, 미국 국무부 차관, 딘 구더험 애치슨 Dean Gooderham Achson이 상원 의원들과 회동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상황 인식을 전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동유럽의 권력자는 러시아입니다. 각하께서 이 구도를 바꾸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경제 원조를 해도 실질적인 협상력을 확보하지 못한다는 것이 각하의 인식입니다. 쓸 수 있었던 유일한 수단은 무기 대여법뿐이었습니다. 이제 그 지원을 줄이면 러시아가 곤란을 겪는 만큼이나 미국도 큰 곤란을 겪을 것입니다. 대통령께서는 정치 목적을 위해 경제를 압박하다가 군사 협력이 위태로워지는 사태도 염려하십니다. 러시아와 단절하는 게 명백하게 불가능한 시점에서 말입니다.” 

- 미국은 일본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기 위해 소련이 필요했다.


리처드 로즈, 수소 폭탄 만들기- 20세기를 지배한 암흑의 태양, 사이언스 클래식 28 ,사이언스북스,2016.pp.264-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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