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신저,"체임벌린의 유화정책을 비난하기는 쉽지만..." Le monde

메테르니히,100년의 유럽 평화를 설계하다!


[히틀러 독일의 군사 강대국으로의 부상에 대해서]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의 재무장이 진행되도록 방치했던 것은 문자 그대로, 그들은 달리 어떻게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영국은 집단안보와 국제연맹을 포기할 준비가 되지 않았고, 프랑스는 너무나 의기소침해서, 자신의 예감에 따라 스스로 행동에 나설 수 없었다 : 프랑스는 감히 단독으로 행동하지 못했고, 영국은 공동으로 행동에 나서기를 거부했다.

돌이켜보자면, 히틀러의 동기에 대한 당대인들의 추정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의 범죄성 뿐만아니라, 그의 야심은 처음부터 명확했던 것이 전혀 아니었다, 집권 2년 동안, 히틀러는 자신의 통치를 공고하게 만드는데 주로 관심이 있었다. 많은 영국과 프랑스의 지도자의 시각에서, 히틀러의 약간 공격적인 외교 스타일은 그의 철저한 반공주의와 독일의 경제의 회복에 의해서 균형을 잡게 되었다. 

정치인이 직면하는 딜레마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행동의 여지가 최대 상태일때, 그들은 최소한의 지식만을 가질 뿐이다. 그들이 충분한 지식을 확보할 즈음이 되면, 결정적 행동의 여지는 거의 사라지게 된다. [역자주-지식과 행동은 반비례한다.] 1930년대 영국 지도자들은 히틀러의 목표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고, 프랑스 지도자들은 입증 불가능한 추정을 근거로 행동에 나서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히틀러의 진정한 본질을 학습하는데 지불한 수업료는 유럽의 한 쪽 끝에서 다른 한 쪽 끝으로 이어지는 수천만개 무덤들이었다. 만약 민주주의 국가가 히틀러의 통치 초반에 그와 승부를 냈다면 어땠을까? 역사가들은 히틀러가 민족주의자였는지 아니면 세계정복을 원했던 미치광이였는지에 대해서 아직도 논쟁하고 있다.

히틀러의 동기에 대한 서양의 집착이 무엇보다 문제였다. 세력균형의 교리는 동쪽으로 작고 약간 국가들과 국경을 맞댄, 크고 강한 독일이 위험한 위협이 된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히틀러의 동기와 무관하게, 레알폴리틱(현실정책)의 가르침이란, 독일과 이웃 국가의 관계는 상대적인 힘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서양은 히틀러의 동기에 관심을 가지기 보다는 독일의 성장하는 힘을 견제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소비했어야 마땅했다.

히틀러를 대적하는데 서양 동맹이 주저한 것의 결과에 대해 히틀러의 선전장관이던 괴벨스 만큼 정확하게 말한 사람은 없었다. 1940년 4월, 나치의 노르웨이 침공 전야, 그는 비밀 보고를 통해서 다음을 주장했다 ; 

"지금까지 ,우리는 적에게 독일의 진정한 목표를 은폐하는데 성공했다. 1932년 이전에 우리의 국내의 적들이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고, 합법의 맹세가 단지 사기에 불과했다는 것을 몰랐듯이 말이다... 그들은(국내의 적) 우리를 뭉개버릴 수도 있었다. 그들은 1925년에 우리를 체포할 수 있었고, 그것은 끝장을 의미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위험지역을 통과하도록 만들지 못했다. 외교정책에서도 이와 정확히 비슷한 것이 있었다...1933년, 프랑스 총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어야 했다, 만약 내가 총리였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 "신임 제국 총통은 나의 투쟁을 쓴 자이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 자이다. 이런 자를 우리와 인접한 곳에서 관용할 수 없다. 그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격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를 그대로 방치했고, 위험지대를 통과하게 만들었고, 우리는 모든 위험한 암초들을 통과할 수 있었다.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해내고, 우리가 그들과 더 잘 무장했을때, 비로서 그들은 전쟁을 시작했다!"

민주주의 지도자들은 현실에 직면하기를 거부했다. 일단 독일이 일정 수준의 무장에 도달한 이상, 히틀러의 진정한 의도는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독일 군사력의 빠른 증강은 만약 그것이 저지되거나 균형되지 않으면, 균형상태를 전복시킬 것이 분명했다. 

이것이 바로 처칠의 고독한 메시지였다. 하지만 1930년대에, 예언자를 인정하는 것은 여전히 시기상조였다. 따라서 영국 지도자들은 정치적 입장차이에도 불구하고 거의 만장일치로, 처칠의 경고를 무시했다. 전쟁 준비가 아닌 군축이 평화의 핵심이라는 전제 하에서, 그들은 히틀러를 심리적 문제로 간주했고, 전략적 위헙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1934년, 처칠이 영국이 독일의 군비 증강에 공군력 증강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정부와 야당이 한목소리로 비난했다. 자유당의 헐버트 사무엘은 "그가 건전하고 제정신의 충고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신중하지 못한 브릿지 게임을 하는 것처럼 보이며, 이 모든 틀에 박힌 주장들은 위험하다."고 반박했다. 노동당의 스태포드 크립스 경은 "그는 마치 중세의 옛 귀족인 것처럼 보이고, 이 나라의 자신의 영지에서의 군축 가능성을 비웃으며, 그와 그의 봉건적 추종자들만이 그들의 안전과 소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을 주장한다는 듯이 말한다. 그의 방법이란 가능한 강력하게 무장하자는 것이다."

보수당 총리 볼드윈은 하원에서의 연설에서 처칠의 제안을 거절하면서, 그는 "약간의 군비 제한이나 감축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고 발언했다. 볼드윈에 따르면, 독일 공군력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기가 매우 어려웠다. 물론 그는 그것이 왜 어려운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리는 독일이 빠르게 우리의 공군력 수준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볼드윈은 현재 상황에서 지나치게 경계하는 것도, 심지어 더 나아가 공황상태에 빠지는 것은 근거가 없다고 믿었다. 처칠을 과장하는 사람으로 규정하면서, 볼드윈은 "우리 혹은 유럽의 어느 누구도 현재 직접적인 위협에 직면하지 않았다. 실질적인 위기 상황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출처-

Kissinger, Diplomacy ( New York: Simon & Schuster, 1994),pp.294-296.     
  



덧글

  • 까마귀옹 2016/09/27 16:49 # 답글

    체임벌린이 그토록 욕을 먹는 이유 중 하나로 '일찍 죽어서'란 것도 있더군요. 2차대전이 터지고 얼마 가지 않아 사망해서 자신의 행동을 변호할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라고.
  • 파리13구 2016/09/27 16:53 #

    지못미..ㅠㅠ

    영국의 카도 지지한 유화정책 아닙니까? ㅠ
  • 까마귀옹 2016/09/27 17:02 #

    게다가 유화정책의 대상이 그 망할 놈의 히총통이고, 자신의 후임자가 처칠이었다는 것도 매우 크게 작용하죠.
  • 파리13구 2016/09/27 17:13 #

    네, 처칠의 글재주야 노벨상 이었구요,

    역사에 대한 언론플레이에 능했던 사람이라

    죽은 체임벌린을 다시 죽이는 것은 비교적 용이했을 것이라 봅니다.
  • 똑같음 2016/09/27 17:17 # 삭제 답글

    우리도 똑같죠.

    북한이 핵 개발할건 뻔하게 알지만 행동하기는 귀찮으니깐


    모르는게 아니죠. 전쟁하기 귀찮고 어려우니깐요.


    체임벌린 스스로도 욕먹을거 같다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 똑같음 2016/09/27 17:19 # 삭제 답글

    히틀러의 목적을 몰랐을리는 없을껍니다.

    하지만 그걸 공직적으로 인정하면 전쟁인데?


    처칠이 비상식적이라고 말한것도 그때문이겠고

    뻔한걸 왜 말하냐정도?
  • 파리13구 2016/09/27 17:25 #

    테일러의 책을 읽어보시면,

    문제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똑같음 2016/09/27 17:28 # 삭제

    문제가 단순하지 않았다?

    전쟁보다 복잡한 문제가 어디 있나요?
  • 2016/09/27 17:36 # 삭제

    [공식적으로 인정하면 전쟁]

    지가 단순하게 말해놓고 전쟁보다 복잡한 문제가 어디있냐니...
  • 똑같음 2016/09/27 17:37 # 삭제

    그 어떤 것보다 전쟁이 생각하기 복잡하기에

    전쟁이라는 선택지를 고를 주장을 할수가 없어진거.
  • 똑같음 2016/09/27 17:38 # 삭제 답글

    히틀러가 유럽을 침략할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나요?

    말로 타일러서 교화시켜요?


    유럽이 먼저 전쟁을 선택해야 하겠죠.

    그런데 그것보다 생각하기 싫은 현실이 어디 있나요?


  • bernstein 2016/09/27 20:09 # 삭제 답글

    체임벌린과 달라디에의 입장에서 전쟁은 쉽사리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아니죠. 독일의 군비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에 전쟁을 했다면, 투표를 통해서 선출된 독일 정부를 뒤엎으려 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실례로 자르 점령 당시 프랑스 군은 독일국민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죠. 이런 상황에서 정당한 명분 없는 전쟁을 하려한다는 피해를 피할 수 없었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정부가 유지될 수 있겠습니까? 명분 없는 선제공격이란비난과 국내의 반전여론에 밀려서 국민의 동의를 받을 수 없었을 것 입니다. 6일 전쟁 때 이스라엘의 선제공격조차도 명분 없는 전쟁이라는 평가를 듣는 상황에서 연합군이 당시에 전쟁을 벌였다면, 대다수 사람들이 비판을 들었을 겁니다.
    당시 파시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생각해 볼 수 있죠. 마크 마죠워가 암흑의 대륙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당시 유럽인들에게 파시즘은 야만이 아닌 새 시대의 대안적인 사상으로 인식되었죠. 대전이후 유럽에서는 대공황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의 위기, 칼 슈미트가 묘사하는 것처럼 위기를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는 무력한 의회주의, 하이데거가 상징하는 것과 같은 기술문명화의 문제가 주요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주의는 많은 이들에게 많은 호응을 얻고 있었죠. 사회주의의 대두와 자본주의의 몰락이라는 위기상황에서 기술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문제 모두를 해결하는 대안으로 인식된 것 아닐까요?
    한국에서는 2차 대전 이전 영국이나 프랑스의 저명한 정치인들이 히틀러나 무솔리니를 대단한 인물이라고 평가한 것을 비판하지만, 당시 시대에서는 그렇게 보일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합국이 소련보다, 이탈리아와의 Stresa Front를 이용한 것도 이런 파시즘에 대한 인식이 반영된 것 아닐까요?
  • 파리13구 2016/09/28 10:46 #

    좋은 글 감사합니다.^^
  • K I T V S 2016/09/28 02:20 # 답글

    아무튼... 체코는 총 한번 못 쏴보고 멸망해버리고 해방 후엔 공산거지국가로 전락해서... 설령 체임벌린이 천국에 가더라도 체코인들이 지옥으로 끌고와서 두들겨 팼을 듯;;;

    (정말 그가 독일에 빨리 선전포고했으면 인류역사가 달라졌을 거라는 말도 있죠;; 체코도 쉽게 망하진 않았을거라고... 참...)
  • Mavs 2016/09/29 17:01 # 삭제 답글

    독일이 아직 약했던 시기에 서유럽이 전쟁을 일으켰다면 지금 우리는 영국과 프랑스를 침략자로, 독일을 불쌍한 피해자로 기억하고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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