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왜 분노가 달콤한가?” Le monde

공감각적 공부란 무엇인가?



김헌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 이상하다. 노여움이 왜 달콤하다고 했을까? 분노에 휩싸이면 고통스럽고 불쾌하지 않은가? 이에 대해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흥미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노여움은 나나 내 사람이 누군가에게 명백하게 무시를 당했을 때, 그것도 적절한 이유도 없이 무례한 폭력처럼 당했을 때 생긴다. 하지만 그의 규정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노여움이 끓어오르기 위해서는 부당하게 당한 만큼 꼭 갚아주겠다는 앙갚음의 욕망이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 보복의 욕구가 없다면, 노여움도 없다는 말. 복수심은 마음의 평온함을 깨뜨리며 고통을 일으키기에, 노여움은 고통을 수반하는 욕구라고 정의된다. 

그런데 어째서 노여움이 “똑똑 떨어져 내리는 꿀보다도 훨씬 더 달콤하다”는 말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말을 잇는다. “모든 역정(逆情)은 보복을 하고 말리라는 희망에서 생겨나는
데, 거기엔 모종의 기쁨이 따라온다.” 욕망은 결핍을 뜻하며, 결핍은 고통을 일으킨다. 하지만
결핍과 욕망이 채워진다면, 고통은 사라지고 환희가 찾아온다. 그뿐만이 아니다. 사람들은 지금 당장 결핍이 채워지지 않더라도, 언젠가 그 욕망이 충족될 것이라고 상상하는 순간에도 충분히 쾌감을 느낄 수 있다. “열망하는 것들을 이루게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달콤한 일이다. 어떤 누구도 자기 자신에게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열망하지 않는 법인데, 역정을 내는 사람은 자신에게 가능한 일을 열망하기 때문이다.” 

무시를 당하여 고통을 받는 사람이 모두 노여워하는 것은 아니다. 노여움은 보복이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상대에 대한 응징을 상상할 때 비로소 생기며, 앙갚음에 대한 열망이 강렬해지고 확신이 설 때, 고통을 넘어 달콤해진다.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에게 무시를 당했을 때 고통스러웠지만, 반드시 갚아 주고 말리라는 다짐과 희망을 통해 쾌감을 가질 수 있으리라는 것.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이었다.

만약 부적절하게 무시를 당하고도 도저히 앙갚음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좌절과 한탄과 억울함, 자괴감은 있을지언정, 진정한 분노는 없다. 불가능한 복수를 잠시 꿈꿀 수는 있겠지만, 불가능을 인식하는 순간 잠깐의 위안은 끝나고, 노여움은 곧 절망과 좌절로 인해 울분으로 잦아들 뿐, 분노로 폭발하지는 못한다. “실제로 있게 된다면 마음에 즐거움을 일으키는 모든 것들은 그것을 희망하거나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도 쾌감을 준다. 이런 까닭에 역정을 내는 것은 쾌감을 준다. 마치 호메로스가 분기(憤氣)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던 것처럼. ‘그것(노여움)은 똑똑 떨어져 내리는 꿀보다도 훨씬 더 달콤하기에?.’ 왜냐하면 어떤 사람도 앙갚음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에 대해서는 역정을 내지 않으며, 자신들보다 능력이 훨씬 뛰어난 사람들에 대해서도 역정을 내지 않거나, 내더라도 훨씬 덜 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욕망 속에는 어떤 쾌감이 따라온다. 왜냐하면 욕망이 채워졌던 일을 기억하거나 채워질 것이라고 희망을 품는 사람은 어떤 쾌감을 즐기기 때문이다.” 


출처-
김헌,“아킬레우스는 왜 노여움이 달콤하다고 했나?”, 한겨레,2011년 9월 2일- 주소 : http://www.hani.co.kr/arti/SERIES/313/49465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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