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이탈리아는 위기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자위권自衛權
명사 <법률> 국가 또는 국민에 대한 급박한 침해에 대하여 실력으로써 방위할 수 있는 국가의 기본적 권리.
그런데, 성경, 특히 신약은 뺨을 맞은 것 같은 침해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하라고 말하고 있을까? 성경은 자위권을 인정하는가?
가령, 신약성경 마태복음의 6장 29절-45절 말씀은 다음과 같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눅 6:29-30)
(마 5: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3)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는 악을
(마 5: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마 5: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마 5: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라(눅 6:27-28, 32-36)
(마 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신23:6, 스9:12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칼 프리드리히에 따르면, 자위권과 기독교사상과 관련해서, 기독교 사상은 자위권에 대해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즉 반격하기 보다는 참는 것이 낫다고 가르쳤다는 것이다.
<자위권과 기독교사상>
-자연법自然法 에 따라 人間이 자위권自衛權 을 가진다는 것은 자명한 것으로 생각되어 왔었다. 그러나 이 명제命題 는 자위권을 행사하는 것이 어디까지 허용되는지에 관한 결정적으로 중요한 질문에 대하여는 대답을 주지 아니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형식적이었다. 基督敎 理論은,「다른 한 쪽 뺨」이라는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불행不幸 을 人間의 견실적 堅實的• 道德的 情熱을 시험하려는 神의 섭리에 의하여 내려보낸 시련으로 보는 옛 유대 理論의 觀點에서, 그것이 허용許容되는 범위範圍를 분명히 좁혔다. 확실히 지배적인 생각은 반격反擊을 가하기 보다는 참는 것이 낫다는 것이었다. 공격자攻擊者 와 맞부딪쳤을 때, 특히 억압적抑壓的인 정부政府와 맞부딪쳤을 때 소극적消極的으로 참을성 있게 고통을 감수하는 역할役割이 기독교인基督敎人 에게 주어졌던 것이다. 시이저에게 시이저의 것을 주는 것一이것은 괜찮은 일인지도 모른다——뿐만 아니라 시이저가 요구要求하는 것이면 그것을 요구要求할 권리權利가 있는지 없는지 너무 깊이 따지지 아니하고 시이저에게 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基督敎人의 적절한 행동양식行動樣式이라고 생각되었었다. 이 점은 저 유명한 로마書 13장의 구절과 같은 「말씀」뿐만 아니라 수없이 많은 성인과 순교자의 실제 행동에 의해서도 분명히 지적되고 있었다.
[칼 프리드리히, 입헌적 국가이성- 안보와 헌법의 수호- 동성사,1987.pp.19-20.]
덧글
지금의 일본의 자위권문제는 군국주의의 부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역사왜곡과 보통(이라고 쓰고 국수주의라고 읽는) 국가를 향해 달려가는 것도 결국은 목적을 우선시하여 수단을 가리지 않는 것입니다.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도 세속적 성공과 교회의 경제적 성장을 위해 성경을 이용해먹는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하물며 국가일까요.
이슬람이 기독교계의 비난을 받는 이유도 자위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지하드를 빌미로 테러를 자행하는 것에 있습니다.
지난번에 지적하신 [윤리와 도덕]의 문제로 비교해보면 분명히 자위권의 한계를 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기독교인이라면 자기희생과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자기반성을 경건함에 이르는 훈련으로 하는 일종의 구세군같은 평화를 위한 군대조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안타까운 건 그런 모습을 찾기 힘들다는 게 안타깝긴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성전, 즉 신성한 전쟁은
자위권과 기독교 사상의 화해를 시도한 것으로 해석가능하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