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벌린과 1933년 옥스퍼드의 분위기... Le mo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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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겨울, 벌린은 칼 마르크스 평전을 써보라는 제의를 받았다.

(라트비아 리가 출신으로 러시아 혁명의 공포를 체험한) 이사야 벌린이 마르크스의 이론에 대해 혐오감을 가질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도 왜 그가 이 일을 수락하였는지를 이해하려면 얼마간 설명이 필요하다. 1933년 초, 대공황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 옥스퍼드에서는 우수한 학생들이 마르크스주의에 매료되었다. 벌린도 옥스퍼드의 모든 좌파 인사 一 크로스먼, 콜, 오스틴, 햄프셔 一 를 한데 모은 핑크런치 클럽 모임에 참석하였다. 

1933년에도 소비에트 연방은 여전히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영국 여론은 강제된 협동농장화로 인해 자기 땅에서 쫓겨난 우크라이나 소작농들이 수백만 명씩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오시프 만델스탐 같은 시인들이 스탈린을 비판하는 시를 썼다는 이유로 체포되고 강제 추방되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옥스퍼드의 좌파 학생들은 국내 경기불황에 대한 대안으로 동구권에 관심을 보였다.

정작 벌린은 이런 열광에 이미 면역이 되어 있었다. 레닌 통치 하의 러시아에서 체카가 언제 문을 두드릴지 모르는 상황에서 보낸 2년의 세월이 마르크스주의에 영원히 반대하도록 예방 접종을 한 셈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주변에서 보인 흥분과 열광의 분위기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친구 오스틴 은 1935년에 모스크바에 갔다가 한창 진행 중이던 혁명의 절제된 금욕주의에 깊은 인상을 받고 돌아왔다. 당시 모스크바의 레닌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던 크리스토퍼 힐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이자 역사 교과서의 저자)은 벌린에게 마르크스 관련 서적을 보내주었다.

(마르크스와 관련하여) 벌린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벌린이 찬양하는 문명사회에 대한 마르크스의 혐오였다. 이것은 향후 그의 평생동안 지속될 일종의 패턴이 되었다. 즉 벌린은 자신이 전념하는 가치를 가장 철저하게 반대하는 이들에 관해 글을 쓰면서 역으로 자신의 가치를 옹호했다. 그리하여 1933년 봄, 이사야 벌린은 지독히도 독단적인 이데올로기의 창도자 칼 마르크스를 벗삼아 5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분명 이는 신성한 결심이었지만, 외로운 작업이기도 했다. 


출처-

마이클 이그나티에프, 이사야 벌린, 아산정책연구원, 2012.pp.132-134.


덧글

  • 섹사 2016/03/25 14:48 # 답글

    당대의 지성들이 집산화의 실체를 몰랐다니 놀랍군요... 30년후 파리의 마오주의자들에게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되는 것인가요?
  • 파리13구 2016/03/25 18:35 #

    몰랐다고 합니다.
  • Megane 2016/03/25 17:49 # 답글

    세상물정 모르는 도련님들이 모인 옥스퍼드였으니 뭐... 외부로의 정보가 차단된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모종의 동경이 싹틀만도... 거기에 경제적인 어려움이 작용한 부분이 컸지요...
    실상을 모르면 누구든 환상향에 대한 몽상을 꾸는 것은 어렵지 않지요.
    ISIL의 실상을 모르면 그들을 동경하는 이들이 생기는 거랑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자기 살림살이가 답답하면 더욱 그렇겠지요.
  • 파리13구 2016/03/25 18:35 #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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