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H.카, 뮌헨협정에 대해서... Le monde

"E.H. 카는 대독 유화론자 였다!"



이후에 삭제되었지만 <20년의 위기> 초판본에는 있던 한 문단에서, 카는 뮌헨협정을 국제문제의 평화적 변화의 사례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카의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1938년 9월 29일에 뮌헨협정의 타결로 귀결된 협상은 중요한 국제문제가 평화적 변화 절차에 의해 해결된 최근의 가장 좋은 교섭이었다. 힘이라는 요인이 고려되었다. 도덕이라는 요인도 강대국의 공동 승인이라는 형식으로 고려되었다. 뮌헨협상에 참여한 강대국들은 분쟁에 적용될 수 있는 기준을 가지고 문제해결을 효과적으로 결의했다 : 민족자결의 원칙 the principle of self-determination 

자신이 독일인이라고 주장하는 325만의 사람들을 체코-슬로바키아에 편입시킨 것의 부당함을 일찌기 영국 노동당과 로이드 조지 Lloyd George 도 공격했다. 그들의 처우에 대해서 체코의 베네슈 Benes 가 평화회담에서 했던 약속도 완전히 지켜지지 않았다. 

이번의 변화 그 자체는 유럽의 힘의 균형의 변화에 부응하는 것이며, 국제적 도덕의 규범을 준수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건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그것은 히틀러가 힘이라는 요인을 병적으로 강조했다는 것이고, 평화적 협상이란 요인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특징을 심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이것이 바로 연합국이 베르사유에서 써먹었던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평화적 변화라는 절차의 확립에 해롭다. 

일단 인정된, 민족자결의 원칙이 무분별하게 적용되면 독일에게만 유리하다는 의혹을 가지지 않을 수 없고, 체코-슬로바키아인의 정서에는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된다. 이번 협상에서 독일은 화해를 위해서 최소한의 양보 조차도 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일부 영국 여론이 이번 협정을 강하게 비판했다. 독일쪽에서도 불만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뮌헨협정이 국제관계의 더 행복한 시대를 열것이고, 협상을 통한 평화적 변화가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전망이 봄에 눈녹듯이 빠르게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1938년에 발간된 다른 책에서, 카는 영국의 유화정책을 더욱 노골적으로 옹호했다. 카는 체임벌린의 현실주의를 칭찬했고, 총리가 화해와 양보라는 일관된 정책을 추구했다고 평가했다.

돌이켜 보건데, 영국이 1933년부터 1938년까지 행한 화해와 양보 시도를 비난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같은 기간 동안 독일이 사실상 쟁취한 양보는 어떤 영국의 진지한 정치가도 전쟁 위협으로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더 넓게 말하자면, 영국 여론은 이미 오래전에, 독일에 대한 군비 제한, 라인란트 비무장, 독일로부터의 오스트리아 독립이 영원히 유지될 수 없으며, 그것들이 사라지는 것은 오로지 시간과 방법상의 문제일 뿐임을 인정했다. 1938년 9월의 뮌헨 위기에서 가장 명백했던 요인은 영국이 1400만 인구 중에 325만의 독일인과 기타의 충성을 다하지 않는 소수민족을 포함한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나라를 위해서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양보를 행한 화해정책을 비난할 수 없다. 비판할 수 있는유일한 근거는 다른 조건으로 양보할 수도 있었다는 것과 그리고 더 일찍 양보할 수 있었는지 일 뿐이다.


출처-

Michael Joseph Smith, Realist Thought from Weber to Kissinger (Political traditions in foreign policy series), Louisiana State University Press (June 1987),pp.8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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