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플라톤이 알파고를 보았다면..." Le monde


플라톤이 알파고와 어떤 상관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플라톤의 <파이드로스>를 보면, 새로운 기술을 접하게 될때 발생가능한 철학의 문제를 제기한다. 새로운 기술이 우리에게 이익이 될지, 해가 될지는 우리 인류의 끊임없는 관심사였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서 주제가 되는 것은 바로 '문자'의 발명이다. 

이집트의 발명의 신인 토트가 문자의 유용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왕이여, 여기에 내가 심혈을 기울려 완성한 작품이 있소. 이것은 이집트인의 지혜와 기억력을 늘려 줄 것이오. 기억과 지혜의 완벽한 보증수표를 발명해낸 것이지요."

그러자, 이집트 파라오 타무스는 다음과 같이 반론했다.

"모든 발명가의 모범이 되는 토트여, 기술의 발명자는 그 기술이 장차 이익이 될지 해가 될지를 판정할 수 있는 최선의 재판관은 될 수 없습니다. 문자의 아버지인 당신은 자손들을 사랑하여 발명해 낸 그 문자의 본래의 기능에 정 반대되는 성질을 부여한 셈 입니다. 문자를 습득한 사람들은 기억력을 사용하지 않게 되어 오히려 더 많이 잊게 될 것입니다. 기억을 위해 내적 자원에 의존하기 보다 외적 기호에 의존하게 되는 탓이지요. 당신이 발명해낸 것은 회상의 보증수표이지, 기억의 보증수표는 아닙니다. 그리고 지혜에 대해서라면, 문자를 익힌 당신의 제자들은 사실과는 상관없이 지혜에 대한 명성을 계속 누리게 될 것 입니다. 그들은 적절한 가르침 없이도 많은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고, 따라서 실제로는 거의 무지하다 할지라도 지식이 있는 것으로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진정한 지혜 대신 지혜에 대한 자만심으로 가득 차 사회에 짐만 될 것 입니다."

토트가 파무스에게 문자의 발명으로 인류가 과거같으면 잊었을 것을 기억하게 되었다고 칭찬하자, 타무스는 다음과 같이 반론했다는 것이다.  "나의 재능 있는 토트여",그가 말하길, "기억은 끊임없는 훈련으로 생기를 불어 넣어야만 하는 위대한 선물일세. [하지만] 자네의 발명 때문에,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기억을 훈련시키려 하지 않을 걸세. 그들은 사물을 내면적 노력을 통해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외부 장치[문자]에 의지 해서만 기억하려고 들 걸세."  

움베르토 에코에 따르면, 우리는 타무스의 고민을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즉 문자, 쓰기의 발명이란 다른 새로운 기술 발명처럼, 인간의 능력을 둔감하게 만들수 있으며, 마치 쓰기가 그것을 대체하고 보완할 것처럼 말이다. 쓰기는 그것이 인류에게 무감각한 영혼, 정신의 묘사, 광물성 기억을 제공함으로써 정신의 힘을 감소시키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에코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는 다음의 두가지 이유 때문에, 타무스의 고민에 공감하지 않는다. 

"첫째, 우리는 책들이 다른 누군가의 생각을 우리에게 주입시키는 수단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  이와는 반대로, 책들은 새로운 생각들을 만들어내는 장치들이다. 프루스트의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같은 대작이 쓰여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쓰기의 발명 덕택이다. 

둘째, 만약 옛날 옛적에 사람들이 어떤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그들의 기억을 훈련시킬 필요가 있었었다면, 쓰기의 발명 이후에는, 그들은 또한 책을 기억하기 위해서 그들의 기억을 훈련시킬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책들은 기억에 도전하고, 기억을 개선시킨다 : 책들은 기억을 무디게 하지 않는다. 

결국 파라오 타무스는 영원한 공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그것은 바로 새로운 기술적 업적이 우리가 가치있고 소중한 것으로 간주하는 어떤 것을 죽일지 모른다는 공포 말이다.

이렇게 볼때, 토트와 타무스의 시대 이래, 문자와 인쇄술 같은 새로운 기술은 인류에게 공포와 근심을 유발하기도 했다.  "이것이 그것을 죽일거야. ceci tuera cela "라는 공포였다. 문자가 기억력을 죽일 것이고,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의 콥추에 나오는 것처럼, 인쇄된 책이 성당을 죽일 것이란 공포였다.

이세돌 사범에 대한 알파고의 승리도 우리 시대의 새로운 기술에 대한 진부한 공포를 자극하고 있다. 물론 알파고가 무엇인가 우리에게 소중했던 것을 죽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죽음이 공포가 될 것이라 결론을 내리기에는 아직 이르다. 

문자가 기억력을 죽이지 못했고, 책이 성당을 죽이지 못했던 것처럼, 알파고도 그런 전철을 밟게 될 수도, 인류의 공포의 대상이 아닌, 인류 발전의 새로운 동력이 될수도 있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삶은 계속될 것이다.



덧글

  • 레이오트 2016/03/13 16:44 # 답글

    진부한 우려와 달리 알파고는 오히려 우리에게 지적능력 면에서 몇 단계 이상 진화할 수 있는 인류문명사상 천재일우의 기회를 줄 지도 모릅니다.
  • 파리13구 2016/03/13 16:41 #

    네, 문자가 기억을 파괴하지 않았습니다.
  • shaind 2016/03/13 16:58 # 답글

    다만 문자 덕택에 과거의 드루이드나 호메로스처럼 엄청난 양의 문헌을 외우는 능력은 사실상 상실한 건 사실이죠.
  • 파리13구 2016/03/13 17:10 #

    네, 호메로스적인 기억력을 상실하면서,

    문자 덕분에 인간이 얻은 것도 있습니다.

    구술문화에서 문자문화로의 문명사적 전환에 대해서는 월터 옹, 에릭 해브록, 맥루한 등의 연구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 ㅂㅈㄷㄱ 2016/03/13 17:45 # 삭제 답글

    기레기 낚시와 알파고 승리의 상징성이 공포감을 부채질 하는데 한 몫 했죠. 이번 사건은 과거 sf소설의 그것과 유사한 점이 너무 많았던지라. 기술의 특이점이니 일자리 축소니 그럴지도 몰라가 현실적으로 다가왔겠죠. 사실 인력의 효율성 극복은 참으로 요원한데 말이죠. 당장 자원문제, 에너지 문제만 해도...로봇은 지칠 줄 모르지만 사람처럼 알아서 음식 먹어서 호랑이 기운이 솟구치는게 아니라 비효율적이고 반환경적인 생산과정을 거친 에너지를 비효율적으로 사용 할수 밖에 없고 내구도도 인간에 비교하면 실례인 수준이라. 뭐 컴퓨터 성능의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고 인공지능이 카피캣화 된 다음 그걸 돌릴만한 고성능의 컴퓨터가 대량생산이 가능해져 가격이 낮아진다면 그제서야 수많은 일자리가 위협받겠지만 적어도 제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볼 일은 요원하겠네요. 게다가 생명공학이 윤리적으로 강력한 태클을 다리몽뎅이 부러질 정도로 받는 걸 보면 미래에서 터미네이터가 날라와서 웨얼 이스 존 코너 라는 희극적인 사태는 걱정 없으리라 봅니다.
  • 우리가 남이가 2016/03/13 18:36 # 답글

    새로운 것에는 항상 희망과 불안감이 동시에 따라붙죠. 그것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진보와 보수로 구분할 수도 있습니다.
  • 키키 2016/03/13 19:29 # 답글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성현의 말씀.. 항상 생각할 기회를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파리13구 2016/03/14 09:42 #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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