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주의자 키신저와 현실주의자 케네디...
키신저의 경고...

니얼 퍼거슨에 따르면, 1961년 베를린 위기에서 케네디는 현실주의자였고, 키신저는 이상주의자였다고 한다.

1961년의 베를린위기는 같은 해 6월, 소련 흐루쇼프의 베를린에 대한 최후통첩으로 시작되었다. 서방 3개국에게 베를린에서 군대를 철수하는데 6개월의 시간을 준다는 것이었다. 이 위기는 8월 13일, 동독 지도자, 발터 울브리히트가 베를린장벽 건설을 선언하면서 그 정점에 도달했다.

베를린 위기에서 케네디의 대응원칙은 현실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우선, 제1의 원칙은 핵전쟁을 막아야한다는 것이었다. 위기가 한창일때, 케네디는 질패트릭 Roswell Gilpatric 국방차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제기랄... 머리를 좀 써요.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700만명의 미국인의 죽음에 관련된 것입니다."

둘째, 재래식 충돌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재래식 전쟁이 핵전쟁 혹은 서양의 굴복으로 끝날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케네디에 따르면, "그래도 장벽이 전쟁 보다는 훨 낫다는 것이다." 

셋째, 소련과 그 위성국들이 그들의 현재 상태를 알게해주는 것에 노출될 것이라는 것이다 : 돌의 형태를 한 자유의 적! 

이와는 다르게 키신저는 가능한 군사적 대응책을 고민했다. 기술적으로 볼때, 베를린 장벽은 서베를린을 둘러싼 것이지만, 실제로 감금된 것은 서베를린 사람들이 아니라, 동독인들이었다. 8월 24일, 동독 국경수비대가 동에서 서로의 탈출을 시도한, 첫 희생자인 귄터 리트핀을 사살했을때, 정확히 누가 감금된 것인지 분명해졌다. 

키신저에게 베를린 장벽은 분노의 대상이었다. 우선, 장벽은 독일이 가까운 장래에 통일될 수도 있다는 일말의 희망마저도 부정하는 것이었다. 둘째, 이는 소련에 대한 미국의 또한번의 양보(유화)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였다.

바로 여기서 다시한번, 키신저는 이상주의자이지만, 케네디는 현실주의자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

Niall Ferguson, Kissinger. Volume 1, The idealist, New York : Penguin Books, 2015.pp.496-497  
by 파리13구 | 2016/02/01 14:51 | Le monde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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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레이오트 at 2016/02/01 17:34
JFK가 저렇게 나올만도 한게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등에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네요. 그런 그에게 전쟁은 더글라스 맥아더의 말처럼 어떤 식으로든 두 번 다시는 겪고 싶은 일이 아니었지요.
Commented by 파리13구 at 2016/02/01 17:39
케네디는 원래 대-소련 강경론자였고,

유화론 비판으로 하버드 대학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런 케네디가 1961년이 되면, 키신저의 시각에서 볼때, 유화론에 가까운 현실주의를 실천하게 됩니다.
Commented by 레이오트 at 2016/02/01 17:59
아무래도 전쟁과 이후 정치계에서의 경험이 그를 그렇게 바꾸지않았나 싶네요.
Commented by 개성공단 폐쇄 at 2016/02/02 00:41
독일통일은 한국으로서는 부러운 일이지만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방향은 아닌 거 같습니다. 학습효과 때문에 김조가 동독과 같은 처지에 빠질 일은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독일의 사례를 들어 햇볕정책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핵문제에 있어서도 리비아의 사례가 김조에게 선택의 여지를 없애 버렸습니다. 봉쇄정책에 굴복할 일은 없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도 봉쇄정책만 고집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김조의 핵무장을 견고하게 할 뿐이죠. 그래서 종북이 아닌가하는 의심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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