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신저,관료주의를 초월하는 정치가가 필요한 이유?
키신저의 경고...

키신저의 정치철학에서, 관료주의는 초월의 대상이다. 막스 베버가 관료제를 비판한 것처럼, 키신저에게 관료제란 '내적 자유의 마지막 자취들을 질식시키는 삶의 진보적 합리화' 에 다름아니다. 키신저의 박사논문, <<회복된 세계>>를 보면, 정치가와 관료는 서로 대립하는 존재이다 :

"정책 입안의 정신과 관료주의의 정신은 정반대의 것이기 때문이다. 정책의 성패는 부분적으로 추정에 근거해서 내리는 평가의 정확성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정책의 진수는 그 우발성에 있다. 반면에 관료주의의 성패는 예측 가능성에 있기 때문에 관료주의의 본질은 안전성의 추구에 있다. 심오한 정책은 부단한 창조와 상시적인 목표의 수정이 가능할 때 잘 만들어진다. 훌륭한 행정은 범속함을 견뎌낼 수 있는 관계를 규정하는,판에 박힌 관행 속에서 이루어진다. 정책은 위험의 조절과 연관되는 반면, 행정은 일탈의 회피와 관련이 깊다. 정책은 수단과 균형감각의 관계에 의해 정당화되지만,행정은 주어진 목적에 비추어 개개의 행동이 지니는 합리성으로 정당화된다. 정책을 관료적으로 시행하려는 시도는 예측 가능성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지고, 결과적으로 사건의 포로가 되기 쉽다. 반면에 행정을 정치적으로 운영하면 완전한 무책임을 초래한다. 관료기구는 집행하도록 고안되었지 입안하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because bureaucracies are designed to execute, not to conceive."
 
[헨리 키신저, 박용민 역, 『 (헨리 키신저의) 회복된 세계』,pp.616-617.]

키신저의 첫 스승이었고, 1950년대말에 워싱턴의 국방부에서 일하고 있었던 프리츠 크래머도 정부 관료주의의 경화증 성향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1956년, 부다페스트에서 헝가리인들이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는 동안, 크래머 본인은 워싱턴의 책상에 앉아 문서 작업만을 하는 자신의 신세를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 :

"우리는 역사가 펜이나 프린터의 잉크에 의해 실제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오, 그렇다. 우리는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을 합리화할 수 있다. 매우 아름답게! 우리의 글이 다른 사람의 정신적 고민을 위한 매우 중요한 무기가 아닌가? 

그렇다, 우리는 다행히도 다음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인간은 우리의 뇌가 결정적 주장에 확신하기 때문에 대담하고 상상력있는 정책을 채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말이다. 대담하고 상상력있는 정책은 두뇌가 아닌, 그들의 마음이 움직여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곳 펜타곤에 앉아있다. 이곳에는 지나치게 단련된 정치과학자들로 가득하며, 그들은 새로운 신념을 확산시켜서 우리의 고귀한 존재에 위협을 가하기 보다는 법률가와 대학교수식으로 주장한다. 열심히도 우리는 무미건조한 양식에 집착하고, 감정의 끝자락에서 용솟음치는 것을 배제한다."


이러한 관료주의의 무미건조함에 대한 키신저의 대안은 영웅적 리더십이었다. 키신저는 아서 슐레진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에게는 거대한 도약을 이끌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 도약이란 기존 추세의 단순한 개선이 아닌, 새로운 환경,새로운 세계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Niall Ferguson, Kissinger. Volume 1, The idealist, New York : Penguin Books, 2015.p.458.] 
by 파리13구 | 2016/02/01 01:20 | Le monde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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